매화기행(산청)-남사마을
28일로 예정되었던 매화기행은 친구의 일정과 겹쳐 포기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21일에 없던 일정이 추가되어 맑고 따듯한날 매화를 보러 남쪽으로 출발했다.
날씨는 이미 일주일 전부터 좋을 것이라고 했었고
갑자기 따듯해진 날씨 덕분에 꽃이 빨리 핀다고 했었다.
오히려 그래서 차가 막힐까 무지 걱정했었지만
주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속도로에는 차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4시간이 채 안걸린 시간에 산청에 도착했다.
정말 작은 마을이고 조용했다.
관광객으로 법석이면 어쩌나 했지만 이곳은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라
관심이있는 사람들이나 찾아오는 그런 곳인듯하다.
산청
경남의 서북부에 위치한 산청군은 동으로 합천·의령군과 접해 있고
서로는 함양·하동군, 남으로는 진주시, 북으로는 거창군과 접해 있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이 이곳에 있으며, 경호강이 군의 중앙을 통과하고,
단계천과 덕천강이 각각 동류·서류하면서 단성면 일대에서 만나 남강으로 흘러드는데,
이들 하천 유역에 비록 넓은 평야는 없지만, 토양이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알맞다.
금서면과 생초면 등지에서 전(傳) 구형왕릉을 비롯한 여러 기의 무덤 등
가야 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가야 계열의 군소국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지리산이 오악(五嶽)의 하나로 숭상되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건립되기 시작하여 불교의 큰 중심지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피해를 받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고,
구한말에는 의병이 많이 일어났으며, 한국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산청 곳곳에는 명찰들이 많다.
법계사, 대원사, 내원사, 단속사터 등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고,
흔적만 남은 절터들도 다수 있다.
신등면 율곡사의 대웅전의 아름다움도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다.
산청이 배출한 인물 중에 그 족적이 가장 뚜렷한 사람으로는
고려 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의류혁명’을 일으킨 문익점과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쓴 남명 조식이 있다.
남명은 처사로 자처하며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경북 안동의 퇴계 이황에 견줄 만큼 독특한 학풍을 이루었다.
단성면에 문익점 면화시배지가 있으며,
시천면에 덕천서원·산천재와 묘소 등 남명 조식의 유적이 있다.
경호강가의 제법 너른 평야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단성향교는
‘진주민란’이라 불리는 1862년 농민항쟁의 시발이 된 역사적인 곳이다.
이것은 관리들의 수탈과 토호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민중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민중의 의식을 한 차원 높이고,
훗날 갑오농민전쟁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그 밖에도 20세기 초반에 변화된 전통 한옥의 모습을
눈여겨볼 수 있는 고향 같은 동네 남사마을과
인간적인 풍모가 풍기는 30㎝ 안팎의 불상 29구가 유례 없이
한 바위면에 무리지어 새겨져 있는 독특한 모습의 도전리 마애 불상군도
매우 흥미를 끄는 문화유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청 - 천왕봉의 힘찬 기상이 어린 땅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돌베개)
산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가는 곳이 남사마을이다.
이곳에 유명한 매화 나무가 있다고 했다.
"남사마을 오매(五梅)"
남사마을
면화시배지를 지나 지리산과 조금 더 가까워지며 만나는 남사마을은
실개천이 마을을 반달 모양으로 휘감아 돌고,
덩치 큰 기와집 40여 채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빽빽이 들어차 있다.
전통 보존 마을로 지정된 곳이 아니라 어느 지도에도 특별한 표식이 없지만,
마을 밖에서 얼핏 스쳐가며 보기에도 예사스럽지가 않다.
산골에 이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한 것이 신기한데,
역시나 옛날에 남사마을에는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 등 여러 성씨가 수백 년간 살았고,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꽤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집들은 대부분 20세기 초에 지어진 부농 주택이며,
과시를 위해 지어진 듯 형태의 과장과 왜곡이 두드러져 보인다.
남사마을은 마을 북쪽의 실개천을 경계로 상사마을(단성면 사월리)과 인접해 있다.
외부에서는 사월(沙月) 또는 남사(南沙)라고 부르며 두 마을을 함께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며
(1906년에서 1914년까지는 행정상 한 마을이기도 했다),
동제를 지낼 때에도 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남사마을에서는 마을 생김새가 반달 모양으로 생겼으니 반월을 메우면 안 된다고 믿어
중심부에는 집을 들이지 않고 농지로 남겨두었다(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중이다)고 하며,
상사마을에서도 마을이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우물 파기를 금해왔다고 한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은 최재기 가옥으로 1920년 최재기 씨의 아버지가 건축하였는데,
3겹의 사랑채도 그렇지만 휑한 마당과 쓰러질 듯 높은 지붕들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사마을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돌베개)
담자락에 살짝 고개를 내민 매화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이곳에서 만나는 매화는 우리나라의 고매화로
섬진강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군락지에서 만나는 매화는
일본에서 가져다 심은 매화와는 종류가 다르다고 했다.
사양정사(泗陽精舍)
사랑채인 선명당
정씨매
정씨집안의 서재 겸 문중회의 장소인 사양정사의 뜰에는
수령 100년 가까운 매화 한그루가 있는데 성씨를 따서 정씨매라고 부른다.
홍매화인 정씨매는 보는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만
사랑채인 선명당의 대청마루에 앉아 보는 매화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세를 과시하기 위해 과장되게 올린 솟을 대문의 모습
이상택 가옥
이상택 가옥은 성주 이씨의 종가이며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안채(18세기 초 건립)와 사랑채(20세기 초 건립)의 건립년대가 200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데,
구조적·조형적 차이를 비교·관찰하면 한옥이 변천해온 과정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사마을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돌베개)
이씨매
흙돌 담장길
최씨고가 가는길
대문은 큰길에서 골목으로 돌아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명문이기때문에 쉽게 대문에 접근할 수 없도록
감추어 놓았다고 했다.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설중매를 최고로 여겼던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목련과 함께 늦게 피는 매화는 베어버리라고했다는 일화를 들으며 웃었지만
요즘 날씨가 더워져서 그렇지 4월초에도 꽃샘 추위로 눈이 뿌렸던 예전 일을 생각한다면
날씨와 상관 없이 계절이 되면 피어나는 매화라면 설중매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남사리 최재기 가옥
최씨매
대청에 앉아서 잠시 쉬는데
최씨고가의 후손이라는 분이 잠시 나오셨다.
고가에 얽힌 사연도 듣고
서울에서 왔다고 평상시 공개하지 않는 안채도 열어 보여주셨다.
안채
우물가
광
디딜 방아도 보이고
위층에 올라가는 계단의 모습이 재미있다.
위층에 보이는 광주리가 닭장이다.
맷돌
맷돌 밑에 있는 돌의 모습을 보니 참 편리하게 되었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닭장
어찌나 개구진지 만나는 사람마다 좋다고 뛰어오르는 바람에 놀랐었다.
굴뚝
궁중에서 보았던 것 처럼 뜰을 건너 보이는 굴뚝은 민가에서는 처음이다.
회화나무
설명은 아래로~
남사마을 이성택고가
X자로 교차한 회화나무 서있는 골목을 지나 들어서면 이성택고가가 있다.
문이 닫혀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아쉬운대로 담넘어 사진기를 올려 찍어보았다.^^
이사재
박씨매
마을에서 바라본 이사재
이사재는 높은 곳에 있어서 이곳에서 내려다 보면
멀리 남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