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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나라보기/2010~2012년

2012, 경복궁...네롱해치를 보러가다^^

by 포도주빛 바다 2016.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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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늦게 작은 오빠네 식구들이 올라왔다.
오늘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여유로운 휴일 아침을 보내는데..
문득 오빠가 가연이가 네롱해치를 보고 싶다는데 경복궁 갈래? 한다.
1박2일 경복궁 편을 보고 나서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리고 엄마가 을지로에 있는 우래옥 냉면을 너무 너무 드시고 싶어하셨었는데
이참에 들러서 냉면도 먹고 경복궁 방문도 하자 싶어서

갑작스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11시반도 안된 시간에 우래옥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우리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그렇게 유명한 냉면집이었나?
하지만 엄마가 좋아라 하시는 것에 비해

평양냉면은 여전히 우리 입에 익숙지 않다.

 

 

우래옥을 나와 바로 보이는 청계천...
엄마가 그래도 한번 내려다 보자는 바람에 새벽다리 앞에 잠깐 차를 세우고
아래로 내려가 사진 몇장을 찍고 올라왔다.

 

 

날씨가 꽤 뜨거운데도 경복궁은 연신 차가 들어간다.
표를 끊고 들어섰는데 예전과 달라진건...
한국말 보다는 외국어가 좀 더 많이 들린다는 것이다.

 


경복궁[景福宮]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왼편으로 광화문이 보이고...

 


광화문[光化門]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그려넣었다.
동쪽문에는 천마(天馬)를 그렸고 서쪽문에는 거북을 그렸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

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권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오른편으로 흥례문이 보인다.


흥례문[興禮門]
창건된 것은 1395년(조선 태조 4)으로,

원래 이름은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주변이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변 행각(行閣)이 모두 파괴되었다.
1990년 정부가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역사바로잡기 차원의 일환으로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뒤, 2009년까지 마무리되는

경복궁 복원사업의 5개 권역 가운데 침전(寢殿)·동궁(東宮)에 이어
3번째로 2001년 10월 26일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면서 철거된 지 85년 만이다.
광화문(光化門)과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는 경복궁의 중문(中門)으로,

2층 목조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주변 행각과 유화문(維和門)·기별청(奇別廳)·영제교(永濟橋)·

어도(御道:임금이 드나들던 길)·금천(禁川:궁궐 안의 개천으로 御溝로 부른다)

등과 함께 복원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원래의 지반보다 1.5m 높게 지었기 때문에
복원 때는 경복궁의 본래 모습대로 1.5m의 땅을 파내고

근정문과 같은 높이로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가연이가 휘리릭 뛰어간다.
네롱해치를 보러간다고...

 

 

다리 양옆에 한마리씩 앉아있는 해치들....
얼굴은 험상 굳고 좀 무서워 보이는 모습이다.

 


해치 [ 獬豸 ]
몸 전체는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는 뿔,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으며,
겨드랑이에는 날개를 닮은 깃털이 있는 전설 속의 동물을 일컫는다.
중국 한나라 때 양부가 지은 <이물지(異物志)>에 따르면

'동북 지방의 땅에 사는 짐승'으로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사람이 싸우거나 사람의 정직하지 못함을 보면 이를 응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사납고 강한 맹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친근하고 해학적 이미지의 동물로 전해지고 있다.
정직한 마음으로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에서 신라시대부터 관복에도 사용했으며,
조선시대에는 해치관으로 불리며 사헌부 관원이 머리에 쓰는 관과

대사헌의 흉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부터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져
경희궁 숭정전과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연경당 등 궁궐 입구에 주로 세워졌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하지만 건너편에 앉았있는 이녀석은

정말 귀여운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
단지 혀를 내밀고 있을뿐인데...
우리 민족의 해학이라고 표현했던가?

 

 

그 험상 굳은 표정이 혀바닥 하나로

 너무 귀엽고 정다운 표정으로 반전시켰다.^^

 

 

그옆 앵두 나무엔 앵두가 주렁주렁 달렸다.

 

 

드디어 근정문이 보이고
문을 통해 근정전이 보인다.

 

 

 

 

 

 

 

 

근정전 [勤政殿]
1395년(태조 4)에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건물이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이 거행되었고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1395년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조선 말기인 1867년(고종 4) 11월에 흥선대원군이
136년만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이중의 월대를 설치하고 그위에 전각을 세웠다.
정면과 후면, 좌우 측면에 계단 설치되었으며 상, 하 월대에는

하엽동자를 받친 돌난간을 둘렀다.
각 계단과 월대 모서리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였고 정면 계단에는

석수를 조각하였고 답도에는 봉황을 새겨넣었다.

다포양식의 전각은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기단의 4면은 석란(石欄)으로 둘려지고, 월대가 있는 마당에는 박석을 깔았고,
월대 정면 계단 아래에서 근정문 방향으로 좌우에는

정1품에서 종9까지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품계석

 

 

근정문 안쪽에서 바라본 흥례문

 

 

 

 

 

 

12지신상 중 하나

 

 

근정전 내부

 


건물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으로 4개,

측면으로 3개씩을 세워 천장을 받들게 함과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外陣)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게 했다.
중앙간 북쪽 후면에 방형(方形)의 보좌(寶座)를 두고,

그 단상에 어좌(御座)와 그 뒤에 일월오악(日月五嶽, 일월곤륜도)을

그린 병장(屛障)을 세우고, 그 위에 화려한 보개(寶蓋)를 달았다.
두공(枓栱 )은 상·하층이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이며

내출목에서는 수설(垂舌)이나 앙설(仰舌)이 구름무늬처럼 새겨진

운궁(雲宮)으로 되었고, 살미[山彌] 표면의 초화각무늬[草花刻文]나

단청(丹靑)·금색쌍룡(金色雙龍)과 조화되어화려한 장식적 효과를 낸다.

전체적으로 장식적 의장(意匠)을 마음껏 담고 있어,
다소 과식(過飾)의 감이 있기는 하나 조선 말기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고,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표본적 건물이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근정전 천정

 

 

 

 

 

 

 

 

 

 

 

 

 

 

 

 

 

사정전[思政殿]
1395년 태조 때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건립되었고

'사정(思政)'이라는 편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이곳은 경복궁의 편전(便殿)으로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펼치던 곳이었다.
정전인 근정전 바로 뒷편에 위치하며 사이에 사정문(思政門)이 있고
사정전 뒤로 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으로 연결된다.
건립당시에는 좌측에 가을과 겨울이면 이용하는 천추전과

우측에는 봄에 이용하는 만춘전이 서로 행랑으로 연결되어

쉽게 건너갈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복궁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867년(고종 4)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건립한 것이다.
하지만 태조 때 건립된 형태와는 달리 좌우 천추전과 만춘전이

서로 행랑으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전각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각지붕 다포집이다.
장대석으로 두른 기단을 3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전각을 세웠다.
사정문(思政門)을 들어서서 마당보다 약간 높게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4면의 기둥 사이는 토벽(土壁)이 하나도 없이

사분합(四分閤)의 광창(光窓)과 문만으로 짰다.
내외 이출목(二出目)의 공포(拱包)로 짜여져 있고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망새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배열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사정전 내부


내부에는 어좌두었고 황금색 용상으로 장식되었으며

어좌 뒤로 일월곤륜도 병풍을 배치했다.
어좌 위로는 두마리의 용이 붉은색 여의주를 중심으로 배치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천정은 우물천장으로 장식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강녕전[康寧殿]
경복궁의 내전(內殿)이며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였으며

침전으로 사용한 전각(殿閣)이다.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건물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儒家)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강녕전의 동쪽 침전을 연생전(延生殿)이라고 지었고

서쪽 침전을 경성전(慶成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며 4단의 기단이 설치되고

가운데에는 월대를 설치하였다.
1553년(명종 8)에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고

없어진 것을 이듬해 중건하고,
다시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그 후 1920년까지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에 창덕궁(昌德宮)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내전(內殿)이 불타버리자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을 다시 짓기위해 강녕전을 헐어버리고
일부는 내전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강녕전을 다시 지었으며

그외 12개 전각이 복원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전각의 처마와 처마가 파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

저렇게 겹겹이 이어지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신발을 벗고 올라서서 강녕전의 내부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예전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언제 부터 였을까?

 

 

우리도 신을 벗고 올라서서 살짝 임금님의 침전을 엿보고 나왔다.

 

 

천정의 모습...

 

 

여름이라 덧문을 저렇게 천정에 매달아 놓았다.

 

 

 

 

 

 

 

교태전[交泰殿]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후인 139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에는

교태전이 없었으며 그 이후에 지어졌다.
건립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종 때에 교태전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으로 불렀다.
교태전이라는 명칭은 주역(周易)의 64괘 중 태(泰)괘에서 따온 것인데
괘의 형상은 위로는 곤(坤)이고 아래는 건(乾)이 합쳐진 모양이다.
지천태(地天泰), 즉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각의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장대석 4벌대로 기단을 쌓아

장방형의 큰 규모의 전각으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우측에는 원길헌(元吉軒)이 위치하고,
좌측에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부속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양의문(兩儀門)이라고 이름지었으며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
1553년 명종 때 경복궁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후 1555년(명종 I0) 8월에 다시 지었으나 이것 역시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1869년(고종 6)에 새로 창건하였으나 창덕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내전이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하기 위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서 재목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교태전 내부

 

 

 

 

 

 

 

 

 

 

 

 

이렇게 궁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본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살짝 감동적이다.
조금더 공부를 하고 온다면...아니 가이드를 해줄 사람을 따라 온다면
더 멋진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진다.
엄마도 많이 힘들어 하고 꼬마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해서
경회루만 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경회루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란다.
다음에 꼭 한번 미리 준비를 하고 다녀가야지 싶어졌다.
경회루의 창으로 바라보이는 풍경을 꼭 한번 보고 싶어졌다.

 

 

 

경회루 [慶會樓]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이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창건될때 경회루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石橋)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荷葉童子)에 회란석(廻欄石)을 섬 주위까지 돌렸다.
경회루는 중루(重樓), 팔작지붕의 2익공(二翼工) 집으로,

누마루를 받는 48개의 높직한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다.

외진주(外陣柱)는 방형석주(方形石柱)이고 내진주(內陣柱)는

원형석주(圓形石柱)이다.
기둥 둘레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졌는데 그 체감률이 경쾌하여 조화적이다.
이 석주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중루를 만들었는데,

마루 밑은 우물천장을 하여 단청을 하였고,
위쪽 마루는 외곽 퇴간부분이 가장 낮고,

그 다음 고주(高柱)와 내고주(內高柱) 사이가 1단 높으며,
내고주 안의 깊은 오간(奧間)이 또 1단 높게 만들어졌다.
이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연회를 베풀 때

품계(品階)대로 앉는 자리 구분이다.
고주와 내고주 사이에 하방을 돌리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서

문을 내리면 방이 되게 되어 있다.
마루 끝 바깥 기둥에 낙양각이 장식되고 기둥 밖으로 계자난간(鷄子欄干)이

아름답게 설치되어 있고,
이 난간은 시각적(視覺的)으로 높은 기둥을 짧게 보이도록

끊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지붕이며, 용마루 끝에는 취두(鷲頭)가 설치되었고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이 설치되었다.
용마루를 높여 웅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지붕의 물매가 급하고,
측면 지붕에는 큰 합각의 삼각형이 생겼는데 건물 평면이 커서

시각적으로 조화되어 있다.
이 집은 건축기술상 너무 커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잘 처리하여 견고하게 지었다.
한국 목조건축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이 누각은

화려한 단청 그림자가 연못 속에 드리워지면
그 영상이 또한 매우 아름답다.

연못은 뱃놀이도 했던 곳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뱃놀이도 했다고 하더니 저렇게 배를 한척 띄어놓았다. ㅎㅎㅎ

 

 

여기까지 보고 바로 나왔다.


그리고 아래 보이는 사진 들은 오빠가 몇주전

근처 빌딩에 작업하러 왔다가 찍었다고 주고 간 사진이다.
경복궁 전경을 이렇게 보는 건 드믄 일이라 반가운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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