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에서 암스테르담 가는길...
암스테르담에 거의 다가설 무렵 멀리 풍차 한개가 넓은 들판에 서있는게 보인다.ㅎㅎ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에 왔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다.
반갑다. 드디어 왔네..
네덜란드 [Kingdom of the Netherlands]
네덜란드의 정식 국가명칭은 네덜란드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이다.
유럽 북서부에 위치하며,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으로 2012년 기준으로 수도의 인구는 74만 명이다. 헤이그(Hague)는 정부소재지이다.
국토의 총면적은 4만 1543㎢(내해수면 제외 시 면적은 3만 7305㎢)이며,
유럽 본토와는 별도로 카리브해 지역에 위치한 네덜란드령 안틸레스(Netherlands Antilles) 제도,
쿠라사우(Curacao), 신트마르턴(Sint Maarten), 아루바(Aruba) 자치령 등의 섬을 소유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총인구는 2012년 6월 기준으로 16,788,583명이며,
민족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며 영어도 통용된다.
종교는 가톨릭(28%), 신교(18%), 기타(10%), 무교(44%)등의 분포를 보인다.
기후는 온난다습한 해양성기후를 나타낸다.
겨울의 평균 온도는 1℃~4℃이며, 여름은 평균 13℃~22℃이다.
네덜란드는 입헌군주국으로서 왕실이 존재한다.
국왕은 국가원수로서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며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한다.
2013년 4월 베아트릭스 빌헬미나 아름하르트(Beatrix Wilhelmina Armgard) 여왕은
알렉산드르(Willem-Alexader)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고,
내각은 국정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국왕에 의해 임명된 정부 각료로 구성되며 총리가 의장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조금 더 달리다 보니 북유럽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력발전기들이 한줄로 늘어서있다.
ㅎㅎ 역시 바람이 많은 나라임에 틀림없다.
드디어 암스테르담에 들어왔다.
구시가지 중심 광장에 들어섰더니 광장은 이런 모습이다.ㅜ.ㅜ
할로윈 축제를 이렇게 요란스럽게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암스테르담 [Amsterdam]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암스텔강의 댐에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암스텔 강에서 1170년과 1173년에 일어난 홍수 직후, 다리와 댐을 건설하면서 마을 이 형성되어 발전하였고, 이후 14세기 초 도시로 승격되었다.
한자동맹으로 인한 무역업의 성행으로 암스테르담은 번영을 누리게 된다.
1515년부터 카를 5세(Charles Ⅴ)의 즉위와 함께 시작 되었던 스페인의 지배 이후
새로운 세금의 부과, 기독교에 대한 종교탄압 등으로 인해 스페인에 대한 저항과
네덜란드독립전쟁(Eighty Year’s War)이 일어나게 되는데 암스테르담은 그 주요 거점이었다.
17세기 황금시대(Dutch Golden Age)에 무역의 발달로 암스테르담은 주요 항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가 자바섬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암스테르담은 북미, 아프리카,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인도, 스리랑카,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무역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회사의 많은 지분을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18세기 후반에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1810년 홀란드(Holland) 지역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1815년 네덜란드 왕국이 설립되면서 19세기는 암스테르담의 두 번째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박물관, 기차역, 콘서트홀 등이 만들어지고 산업혁명의 여파로 암스테르담과 라인강을 연결하는
암스테르담-라인 운하, 북해와 최단으로 연결되는 북해 운하 등이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암스테르담은 기존의 도시경관을 보전하면서 도시를 확대하고
교외지역 개발에 힘썼으며 1977년에는 교외지역과 암스테르담 간에 지하철이 처음으로 운행되기도 하였다.
시의 중심은 여러 개의 운하로 둘러싸인 부채꼴 도시로,
반원형의 구시가는 크고 작은 운하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장관을 이루며
도시 형성과 개발 과정 자체가 도시의 상징이자 관광자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도시의 틀을 형성하는 암스테르담 운하와 암스테르담 방어선(Defence Line of Amsterdam)은
암스테르담의 17세기 운하 연결망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17세기에 인구의 증가로 도시를 확장하면서,
중세시대에 싱겔(Singel)이라고 불리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곳을 중심으로 약 90개 이상의 섬을
약 1,200여개의 다리로 연결하였으며,
이로서 더 넓은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도시를 수놓는 운하와 다리가 인상적이라 하여
북부의 베니스(Venice of the North)라고 불리기도 한다.
도시의 명소로 1885년에 개관한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Rijksmuseum),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을 비롯한 40여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으며,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가족과 함께 은신했던
안네 프랑크의 집(Anne Frank Huis)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남쪽의 담 광장에는 오래된 왕궁을 비롯하여,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국왕의 즉위식을 행하는 신교회(新敎會) 등이 있고,
동남쪽에는 렘브란트 판 레인(1639∼1658 거주)의 집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200여개 이상의 라이브 공연장소가 있으며
세계적인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의 본거지로서
발레와 오페라공연이 다양하게 열린다.
유럽 대륙의 도로•철도•항공로의 요지로서 카엘엠(KLM:네덜란드 항공사)의 본거지인 스히폴공항이 있으며, 유럽 육상교통의 한 거점으로서 다양한 국제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암스테르담 마담튀소밀랍인형 박물관
세계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저곳에 들어가기 위해 한 50m는 줄서있는 모습이었다.
암스테르담 신교회
담광장에 위치해 있는 고딕양식의 신교회.
성 카트리나 교회라고도 불리며, 국왕의 즉위식을 올리는 곳으로 유명한 명소이다.
암스테르담 왕궁
암스테르담을 방문하는 귀빈들을 위해 현재도 사용되며,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고 있다.
루이스 나폴레옹 왕이 1808년 왕실로 용도를 바꾸기 전에는 시청 건물이였다.
시끄럽고 정신 없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몇컷 찍었다.
심심하기로 유명한 유럽에서 이런 모습은 정말 드물기도하지만
아이들이 너무 너무 신나보였다.
제대로 정장을 갖춘 마부가 끄는 마차가 서있는 거리는 영락없는 영화속의 한장면이다.
같은 장소에 서서 거리를 카메라에 담았다.
전차가 다니고, 자동차가 다니고, 게다가 자전거 도로가 엄청나게 잘 만들어졌있어서
쏜살 같이 달리는 자전거가 자동차 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I amsterdam" 심볼
이 앞에서 사진 한장 찍어보려고 10장도 더 넘게 찍었던것 같다.
어찌나 기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던지...ㅜ.ㅜ
나야 이젠 그런 열정이 없는 터라 사람들이 없는 틈을 비집을 수 밖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Rijksmuseum Amsterdam]
기초는 오란예 공가(公家) 윌리엄 5세의 컬렉션이다.
1795년 프랑스혁명에 의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 붕괴 후에 오란예 공가의 수집 미술품 일부는
루브르미술관에 흡수되고, 나머지 일부는 1800년 헤이그에 설립된 국립미술관에 수장되었다.
1806년 네덜란드 왕국을 만들어 왕이 된 황제 나폴레옹의 아우 루이 보나파르트는 암스테르담을 수도로 하여, 왕궁의 일부에 미술관을 설립하고, 헤이그의 국립미술관의 수장품 225점을 옮겨 전시함과 동시에,
1808년 로테르담의 판 흐루네벨트의 수집회화 65점을 사들이는 등 수집을 계속하여
암스테르담시에서도 가장 유명한 렘브란트의 《야경(夜警)》과 판 델 헬스트의 《시경단원의 연회》를
포함하는 6점의 회화를 기증받았다.
또 18세기 네덜란드 미술로 유명한 판 헤델 해벨스의 컬렉션을 매수하는 등 수집에 열을 올려,
작품수는 급격히 증대하였다.
그러나 1813년 프랑스의 지배가 끝나자 루이왕의 미술관은
네덜란드 왕국에 복귀한 6대 오란예공 윌리엄 1세에게 계승되어
1815년 레이크스뮈세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루브르에 몰수되었던 작품이 반환되어 전시장이 좁아져서 새로운 미술관의 건설이 기획되어,
1885년 P.카이파스의 설계로 고딕과 르네상스 절충양식의 현재의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조각·공예· 응용예술품과 동양미술을 전시한 화랑과, 판화와 회화를 전시하는 화랑의 2개로 나누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네덜란드파의 회화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렘블란트의 초상화
관용과 자유의 정신, 암스테르담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이 활약하던 17세기는
네덜란드의 황금의 세기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전 유럽의 지식인들이 몰려들다시피 했는데,
가장 큰 이유로 당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자신의 나라에서 도피해온 수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암스테르담에서 활발하게 토론을 하며
지식을 나누었고, 그 결과물들이 속속 출판되었다.
직접 암스테르담으로 올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저작물을 이곳으로 보내 출판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출판 중심지의 하나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데카르트, 로크, 스피노자 등이 당시 활발하게 활동한 철학자들이었다.
렘브란트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렘브란트는 인간의 감정과 영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고,
주로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들임에도 색다른 해석을 부여했다.
유다는 단순히 배신자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상이었고,
예수 또한 성스럽기만 한 자리를 벗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자를 그릴 때도 이상화된 여성미는 관심이 없었다.
미인이라 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여성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추의 미학'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의 그림은 당시의 관행을 힘차게 뛰어넘었기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현재에는 그의 예술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그의 탁월한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은 렘브란트 하우스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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