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에서 올때는 왔던 길로 되돌아 나와야한다.
하지만 갔던길로 되돌아 나오는 건 정말 재미 없는 일이라며
봉화로 돌아나오라는 제안을 들었다.
봉화로 돌아 오며 오전약수탕, 닭실마을도 볼만하다고 추천해주셔서
네비를 찍고 찾아나섰다.
네비가 알려준 곳에 분명 오전 약수탕이라는 안내판도 있고
약수가 쏟아지는 듯한 모습도 보이지만 그 넓은 주차장에 차가 한대도 안보인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곳을 왜 추천하셨나 알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려 이리저리 탐색을 하다 보니 길이 하나 보인다.
따라 올라가 물어보니 좀더 가면 약수터가 있다고 했다.
정말 약수터가 있고 생수통을 파는 가게도 보인다.
그 통에 약수를 담는 사람들도 몇분 보이고...
성분표라서 찍었는데 촛점이 안맞았다.
물을 담고 계신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정말 몸에 좋은 물인지...
그렇다고 하면서 마셔보라신다.
옆에 있는 바가지에 한모금 저오 떠서 먹어보았더니 약수 맞다.
그런데 철분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녹물을 마시는 느낌이란...
예전에 방아다리 약수도 비슷한 맛이었는데 훨씬 맛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물맛이 좋으면 병을 가져다가 좀 떠가려고 했는데...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오전약수탕
오전약수탕이 있는 마을은 예전에 쑥밭이란 뜻에 애전(艾田)으로 불리던 곳인데
이 쑥밭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지역이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였기에
그런 뜻으로 수전(水田)이라 하였는데, 다른말로 쑤뱅이라 불리던 것이 쑥밭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이곳 약수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한센병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고
이 지역에 있는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쑥밭이라 불리웠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전 약수터는 물야면 오전리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봇짐장수(褓負商) 곽개천이라는 사람이 서벽장을 보고 주실령을 넘어 후평장으로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와 이르기를 "네 옆에 만병을 통치할 수 있는 약수가 있다"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옆을 보니 과연 약물이 솟고 있었고,
조선 제9대 성종(1469 ~ 1494)때 발견된 이 약수는 이듬해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뽑혔다고 한다.
이 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쏘는 맛이 일품이며 주요성분은 유리탄산, 망간, 마그네슘이온, 염소, 중탄산,
칼슘이온, 철분으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편, 오전약수탕 주변 등산로는 백두대간 구간으로 최근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고 있고
맥반석 찜질방이 있어 약수샤워도 즐길 수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마지막 코스로 닭실마을을 찾았다.
네비도 잘 모른다...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가 닭실로 입력하니 알아먹는다...-_-
하지만 기꺼 데려다 준곳은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없는 정말 닭실마을 이다.
할머니 한분이 여기 들어오면 안된다고 살짝 화를 내시며
돌아서 저리 가보라고 알려준다.
좁은 농로를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도착한곳에는 작은 정자와 기념관이 있다.
직원 한분이 입구에서 우리를 맞는다.
청암정이라고 써있는 곳만 볼 수 있다면 대략의 설명을 들려준다.
닭실마을과 청암정
닭실마을로 널리 알려진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酉谷里)는 안동권씨들이 모여 사는
봉화의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조선시대에는 내성현(奈城縣)에 속한 곳으로 본래 봉화(奉化) 지역에 해당되는 곳이지만
안동부(安東府)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마을에 안동권씨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 이후라고 전한다.
권벌이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 파직을 당하여 물러나와
1521년부터 파평윤씨(坡平尹氏)의 터전이었던 이곳 내성(柰城) 유곡에 입향하여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닭실마을에는 권벌과 관련된 청암정(靑巖亭) 등의 유적이 여럿 남아 있다.
닭실마을이란 동네 이름은 이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된 것으로,
황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소위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세로 이루어진 마을이 닭실마을이다.
『택리지』에 따르면 이곳 닭실마을은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앞내마을 및 하회마을과 더불어
3남의 4대 길지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닭실마을의 공간적 특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가 보는 것이 좋다.
마을 진입로 옛길은 산사를 찾아가는 길처럼 개울과 산을 건너가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오랜 시간 물에 깎여
다양한 모양으로 형태를 갖춘 바위들을 만날 수 있고,
맑은 계곡물 주변에 빽빽하게 들어찬 춘양목이라는 붉은 껍질의 소나무가 이루어내는 장관도 감상할 수 있다.
이 계곡 왼편 산기슭 바위에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의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조금 더 오르면 충재의 큰아들인 권동보가 1535년에 지은 석천정사(石泉精舍)가 나타난다.
석천정사의 누마루에 걸터앉아 바위 뒤에 있는 석천의 약수를 마시면서 흘러가는 계곡물을 감상하노라면,
옛 사람들이 왜 거기서 시를 짓고 차를 마셨으며, 자연과 더불어 어떻게 정신을 가다듬었을지 짐작하게 된다.
이 석천정사에서 산을 뒤로 돌아들면 산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고택들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닭실마을이다.
석천정사 앞 계곡을 따라 소나무 숲을 빠져나오면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나타나는 마을의 전경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마치 특별한 공간 속의 세계를 보는 듯 하다.
먼저 충재 권벌의 종택은 뒷산의 오른쪽 줄기인 마을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백설령의 암탉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전면에 논이 있고 논길을 따라 좌우 세 칸의 문간채를 거느린 솟을대문이 서 있다.
이 가옥을 지은 권벌 선생은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격조를 간직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평소 『근사록』을 애독하였다고 하며, 을사사화 때는 홀로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당시의 삼대신(三大臣)인 윤임, 유간, 유인숙을 구하는 논지를 주장하다가
그 일로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어 별세하였다 한다.
이 집안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독립운동을 돕다가 많은 어려움을 겪은 집안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에서>
담장 건너 보이는 기와집들이 안동권씨 집성촌이라고 했다.
마을을 빠져나오며 멀리 마을의 전경이 보인다.
봉화...
매일 일기예보 시마다 거론 되는 곳이기도 하다.
여름엔 가장 더운 곳으로, 겨울엔 가장 추운 곳으로...
창을 열었더니 훅~ 하고 더운 바람이 들어온다.
올해 처음 느껴본 무더운 기운인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지리 공부는 이렇게 직접 다니며 해야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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