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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나라보기/2013~2014년

2014, 영주-부석사

by 포도주빛 바다 2016.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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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를 최종 목적지로 결정하고 검색을 하곤 포기하고 싶었었다.
지도에서 보여지는 사찰은 너무 높아 보였다.
엄마가 과연 얼만큼 걸어줄지...ㅜ.ㅜ
일단 부딪혀보자고 생각했었다.
부석사 경내에 들어서자 바로 주차비 징수하는 경비원이 차를 세웠다.
3,000원의 주차비를 내며 물었다.
혹시 여기 주차장 말고 좀더 가까이 주차가 가능한지...
마을을 따라 돌아 올라가면 위에 주차를 할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지도에서 얼핏 또 다른 주차장을 본기억이 나서 물었는데 예상대로 였다.
꼭대기에는 정말 작은 주차장이 있었다.
그래서 일주문 부터 시작하는 모든 코스를 패쓰하고 바로 삼층석탑을 만났다.

 

 

 

부석사 삼층석탑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26m, 기단(基壇) 너비 3.56m이다.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국보 18)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으로서, 기단의 위층에 탱주(撑柱: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가 하나, 아래층에 둘인 것만 보아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지대석과 아래층 기단의 하대를 한데 붙여 8석으로 짜고 중대석 각면에는

우주(隅柱:탑 몸돌의 모서리에 세운 기둥)와 탱주가 있어 3구로 구분하였으며 갑석은 6매석이다.
위층 기단은 4매석으로 갑석을 짜고 각면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탑신(塔身)과 옥개(屋蓋)는 각 층마다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각층 옥신에는 우주가 있고 조각은 없으며 옥개 밑의 층급받침은 5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불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과
복발(覆鉢:불탑의 노반 위에 있는 장식으로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만 남아 있다.
1960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 중앙에 얕은 사리공이 있었으나 사리 장치는 없고,
기단부에서 철제탑(鐵製塔), 불상 조각,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랐으나 탑신부 각부의 비례에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 둔중한 감이 있지만,
건실한 체감, 비례를 보여 장중하게 보인다.
<네이버 두산백과에서>

 

 

 

부석사 [ 浮石寺 ]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돌계단을 올라서니
석등이 보이고 석등 뒤로 건물이 보인다.

 

 

그 이름도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浮石寺 無量壽殿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부석사(浮石寺)의 본전(本殿)으로서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그후 몇 번의 중창(重創)이 있었고, 조선 광해군(光海君:1608∼1623) 때 단청(丹靑)을 하였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추녀의 네 귀를 8각 활주로 받쳐주고 있다.
전면(前面) 기둥 사이에는 중앙어간(中央御間)과 양협간(兩夾間)에 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고
단간(端間)에는 창문을 달았다.
기둥에는 알맞은 배흘림이 안정감을 주며 간결한 두공(枓栱 )과 우주(隅柱)에 보이는 귀솟음 수법은
건물 전체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자잘한 정자살 분합문 위에 시원스런 포벽(包壁), 그 위에 가늘고 긴 기왓골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네이버 두산백과 중에서>

 

 

 

 

 

무량수전 앞 석등
높이 2.97m. 국보 제17호.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4매로 짠 방형의 지복석(地覆石) 위에 1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네 면에는
각각 2구씩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으며 상면에는 팔각의 하대석(下臺石) 받침 2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모서리를 향하여 한 잎씩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조각되었고 꽃잎 끝은 말려서 귀꽃이 되었다.
특히, 복련 중심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이 있어 연꽃 속에서 간주(竿柱)를 받쳐 올리는 듯이 표현되었다.
간주는 전형적인 팔각주(八角柱)로서 굵기나 높이가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상대석(上臺石)은 통식을 따라 평박(平薄)하나 여기에 조각된 8엽의 앙련(仰蓮)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팔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고
화창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돌려 뚫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앙련 위에 보살입상 1구씩이 조각되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다.
옥개석(屋蓋石)은 낙수면이 우뚝하고 추녀 밑에 약간의 반전(反轉)이 있고, 정상에는 복련이 조각되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에서>

 

 

무량수전과 석등

 

 

 

부석사안양루[ 浮石寺安養樓 ]
정면 3칸, 측면 2칸인 다포계(多包系)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부석사의 주불전(主佛殿)인 무량수전의 바로 앞에 세운 2층 누각(樓閣) 건물로서,
2단으로 쌓은 높고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는데,

앞쪽 2줄의 기둥은 아랫기단 위 자연석 주춧돌에 놓여 있고, 뒷줄의 짧은 기둥은 윗기단에 놓이게 하였다.
누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한 일종의 누문(樓門)이다.
누 위의 기둥 배열은 아래층과 똑같이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기둥은 층단주(層斷柱) 형식으로 되어 있다. 위 아래층 모두 기둥 사이에 벽체를 가설하지 않고 개방하였다.
가구(架構)는 기둥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르고 그 위에 공포(栱包)를 짜올렸다.
공포는 안팎으로 각각 삼출목, 이출목의 포작(包作)으로 짜맞추었는데,
외부의 살미첨차는 모두 쇠서[牛舌]형이고, 내부의 살미첨차는 다 메뚜기머리모양을 택하고 있다.
첨차의 조각 수법이 견실하여 조선 중기 건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첨차 끝부분을 호형(弧形)으로 처리하지 않고 경사지게 끊어낸 모양으로 다듬어서
부석사의 고려시대 건물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내부의 가구는 앞뒤 기둥 사이를 대들보가 지나가도록 하고,

그 위에 조각한 화반대공(花盤臺工)을 올려 놓아서 마루보를 받치게 한

무고주(無高柱) 5량가(五樑架)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井자형 귀틀에 천장판을 끼우고 소란대로 고정시키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단청은 금모루단청[錦毛老丹靑 : 부재의 양 끝 또는 한 끝에 머리초를 그리고, 중간 또는 다른 부분에는

단색으로 칠하고 무늬를 넣는 단청]인데, 원래의 단청은 아니고 뒤에 다시 칠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건물 가운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에서>

 

 

 

 

 

부석[ 浮石 ]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네이버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통건축 중에서>

 

 

 

 

 

 

 

 

무량수전에 올라 내려다 보이는경치는 정말 아름답다.
부석사의 건축들은 내가 본 사찰중 가장 맘에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에 펼쳐진 경치가 완전히 마음을 사로 잡는다.
언제까지고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평안해지는 느낌이 너무 너무 좋았다.

 

 

 

 

건물의 처마가 연결되어진 모습...

 

 

 

 

 

 

 

 

 

 

 

 

 

 

 

 

 

 

 

 

 

 

 

 

빠르고 쉽게 부석사를 다녀 나왔지만.. 왠지 허전하다.
일주문을 지나오지 못한 탓일까?
다음에 또...를 기약하며 부석사를 뒤로하고 나왔다.
엄마를 위해 온천을 가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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