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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14 인도차이나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 앙코르 왓

by 포도주빛 바다 2015.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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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후
이번 캄보디아 여행의 하일라이트 앙코르 왓으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멀리 강(해자)건 거대한 유적지가 눈에 들어온다.

 

 

 

 

 

 

다섯개의 탑이 눈에 들어왔다.
사면에서 보면 탑이다섯개이지만 정면으로 가면 탑은 세개만 보인다.

 

 

 

 

해자를 건너기 위해 정면에 섰다.

 

 

마치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ㅎㅎㅎ

 

 

길이 반은 반듯하고 반은 저렇게 엉망이다.
반듯한 길은 복원이 끝난것이고 반은 아직 복원 되지 않은 것이라고...

 

 

여러개의 머리를 갖은 뱀의 형상

 

 

 

좌측, 우측에 보이는 작은 건물이 서고라고 했다.

 

 

 

좌측 서고

 

종려나무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때
유대인들이 흔들었던 그 종려나무와는 종류가 좀 다르다고 했다.

 

 

 

종려 나무는 쓰임이 많다고 한다.
저렇게 수액을 받아서 음료수 대용으로 사용했으며
나뭇가지로는 엮어서 모자나 지붕을 만들어썼고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드디어 자주 보았던...
그리고 가장 탑이 잘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물에 비치는 탑까지 10개가 모두 보이는 곳이다.
여기서 기념사진 팍팍 찍어주시고
잠시 휴식을 하러 이동했다.

 

 

앙코르 왓 [Angkor Wat]


앙코르톰의 남쪽 약 1.5km에 있으며, 12세기 초에 건립되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m 남북 1,300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m의 해자(垓字)를 건너면 3기(基)의 탑(塔)과 함께 길다란 익랑(翼廊)이 있고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참배로(參拜路)를 따라 475 m쯤 가면 중앙사원에 다다른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m)이 4m, 제2회랑(115×100m)이 12m, 제3회랑(60×60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은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m의 중앙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四角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石彫裝飾)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全長) 760m에 이르는 제1회랑벽(回廊壁)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泉水],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柱廊)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舞姬) 아프사라스,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뱀,
창문·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다.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 그때부터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전화(戰禍)와 약탈로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이다.
1982년 집계를 보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파괴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3년 이 유적지의 복원을 위해 조사단의 파견을 캄보디아 당국에 통보한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사원(Wat)의 도시(Angkor)'라는 의미를 가진 이 거대한 사원은

'분열의 시기'에 마침표를 찍고 등장한 수리야바르만 2세(Suryavarman, 1113-1150)이

사후 세계를 위한 사원으로 건축되었다.
이 놀라운 건축물을 세운 왕의 치세는 지칠 줄 모르는 대외 원정과 수많은 사원 건설이 특징이다.
배후의 쯔엉 썬 산맥을 넘든가 수백 척의 함선을 동원해 베트남을 수시로 공격했다.
참파도 당연히 희생물이었으며 서쪽으로 버마와 말레이 지역도 캄보디아 군대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도 수립되었다.
송대 중국에서 맞은 캄보디아의 사절들 중 하나는 그가 보낸 것이었다(Coedes 1968 : 162).
군사적 · 정치적 성취와 더불어 사원들이 줄곧 세워졌는데, 앙코르와트는 이런 행위들의 최종적 결정체였으며
그는 이 건축물에 자신의 위대한 시대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앙코르와트로부터 우리는 당시 캄보디아의 인력 동원 능력, 종교적 성향 및 열정,

국부(國富), 예술 수준, 우주관, 도시의 구획 방식 등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 내부에 약 1.5㎞에 이르는 긴 회랑을 따라

정교한 부조를 새겨 놓음으로써 당시의 전쟁, 군사 기술, 크메르인은 물론 각 민족(참파, 타이인 등)의 복식 및

외향, 무기, 동식물 등에 대한 매우 방대한 자료를 인류에게 남겨 주었다.
예를 들면, 그의 모습임이 분명한 캄보디아 왕 및 그 앞에 모여 있는 신하들의 부조도

백 마디의 글보다 왕과 신속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1차 사료이다.


앙코르와트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210㏊(약 650,000평)이다.
지상을 상징하는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의 총 길이는 5.5㎞이며, 이는 다시 폭이 약 200m인 해자로 둘러쌓여 있다.

해자는 힌두적 우주관의 관점에서 볼 때 대양(大洋)을 상징한다.

사원의 중앙에는 총 다섯 개의 탑이 있다.
그중에서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는 탑은 높이가 65m이다(Rooney 1997 : 129-130).
건축에 약 30년 걸렸다는 이 사원은 쿨렌산에서 운반해 온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중앙의 다섯 개 탑과 사원을 둘러싼 벽의 네 모서리에 있는 네 개의 탑은 전부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하니(Hall 1955 : 105)

그 장관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중앙의 탑 안에는 수리야바르만의 경배 대상이며 장차 자신이 죽은 뒤에 합일할 신으로 비슈누신이
서쪽을 향한 채 모셔져, 앞이마에 박힌 에메랄드 보석이 석양을 반사해 눈부신 빛을 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캄보디아 사회에 많이 퍼져 있던 불교의 흔적도 있는데,
1,000개의 불상을 모신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이 그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종교 건축물들이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비해

앙코르와트는 정반대로 서쪽을 향해 있다.

동남아시아 연구자들은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 이유를 소개해 왔다.
즉, 왕이 힌두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바라보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좀더 낭만적인 설명은 앙코르와트에서 맞을 수 있는 석양의 노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수리야바르만 2세가 그 방향을 택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전자에 비해서 후자가 훨씬 더 합리적인 설명이다.
힌두신은 물론이고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까지 동남아시아에서 볼 때
서쪽에서 들어오지 않은 종교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원이나 교회를 서쪽을 향해 짓는 경우는 없었다.
실제로 앙코르와트 중앙탑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황홀하다.
그러나 저녁 노을의 아름다움에 대한 수리야바르만 2세의 취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 거대한 종교 건축물을 관례를 뒤엎고 서쪽으로 향해 건설하게 한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자는 수리야바르만 2세가 파천황의 발상을 했다는 것은 자신감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전통 신앙과 더불어 힌두교와 불교를 수백 년간 경험하면서
자신들 고유의 신앙 체계를 확립해 온 크메르인들의 종교적 자신감이 새로운 실험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왕권의 강화이다.
유사 이래 최대의 사원 - 자신과 합일하는 신을 모신 - 을 건설한 인물이라면
그에 상응한 왕권이 뒷받침되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 시기에 와서 왕권이 곧 신권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에 이르렀다면 왕이 바라보고 싶은 곳이
곧 신이 바라는 곳이었으니 관례를 깨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동남아시아사. 저자 최병욱.미래엔>

 

 

 

코코넛 한잔(?) 씩을 배급 받았다.
달콤하고 시원하니 목마를때 마시기 딱이다.
다 마시고 낫더니 예쁘장한 캄보디아 소녀가 웃으며 코코넛을 받아서
커다란 도끼비슷한 칼로 사정없이 내려쳐서 조각을 만들어 숫가락과 건넨다.
껍질에 하얗게 붙어있는 부분을 긁어 먹으란다.
달콤하고 고소하니 맛있었지만
잘 떨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살짝 느끼하고
힘이들어서 그런지 그닥 당기지 않아서 소녀에게 건네줬더니
손수 팍팍 긁어서 하얀 덩어리만 다시 건네준다.
고맙지만 사양하고 일어섰다.

 

 

사원의 2층 회랑을 따라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참 많은 부분을 설명들었지만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가면 삶의 이야기가,

왼쪽 방향으로 돌아가면 사후의 이야기가 나온다고했다.

 

 

 

 

100여전부터 시작된 복원 작업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며
오래전 복원부분이 잘못되어 다시 복원 계획을 붙여놓은 곳도 보인다.
일본이 복원하는 지역, 독일이 복원하는 지역들이 각각 다르다고 했다.

 

 

 

이 회랑의 천장은 아직 복원 되지 않았다.

 

 

 

 

 

복원된 회랑의 천장은 이런 모습이다.

아름답다.

 

 

 

 

 

저 탑에 올라가야한다고 했다.
모자는 벗고... -_-;;;
나무로 만든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예전엔 나무계단이 없어서 미끄러운 돌계단을 기어서 올랐다고 했다.

 

 

 

 

 

 

 

 

탑에 올라 회랑을 따라 걸으며 주변 경관을 감상하고
안쪽 뜰을 내려다 보았다.
스페인의 커다란 대성당의 탑에 올라 내려다 보던 모습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압살라의 모습

 

 

 

일부에서는 앙코르왓이 무너지고 있어서 폐쇄될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나도 그런말을 들었고 그래서 얼른 다녀와야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마도 폐쇄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이 유적지도 관리를 캄보디아에서 하는것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권리를 갖고 있어서
이익의 70% 이상을 가져간다고 했다.
베트남에서야 한사람의 관광객이라도 더 들어오면 그만큼 이익이 생기는 것이고
유적이 망가져도 자기네 유적이 아니라서 그닥 상관 없을 것이라며
그래서 이렇게 수익이 높은 유적지를 폐쇄할 이유가 없다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듣는 나도 안타깝다.

 

 

 

 

 

해자를 건너며

마치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건너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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