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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14 인도차이나

캄보디아, 씨엠립 청과시장과 왓트마이 사원

by 포도주빛 바다 2015.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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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노닥 노닥 짐을 싸들고 호텔을 나왔다.
9시반이 넘은 시각에 호텔을 출발하여 들른 곳이
청과 시장...
볼거리가 될것이라고...
우리와 비교해 보라고 했다.

 

 

처음 들어서며 아주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갔었던 시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늘어 놓은 과일과 야채들을 보며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과 닮은 것도 다른 모양의 것도 보인다.
처음 보는 것은 무엇인지 아주 궁금해 하면서...
눈에 뜨인 것이 꽃다발로 만들어 놓은 연꽃이다.
연꽃이 저렇게 이쁜 줄 몰랐다.
발렌타인 데이라서 연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쌓여있는 파인애풀이 없었다면 한국의 과거 어느 시점 쯤인줄 알았을 것이다.ㅋㅋ
베트남의 거리 모습은 우리나라의 7,80년대의 모습과 닮아있었고
캄보디아는 5,60년대의 모습이라고 했다.
딱 경제수준이 그만큼이라고...
그런 말 때문인지 좌판을 벌이고 앉은 아낙들의 모습들이
오래전 우리 부모님들의 살아왔던 모습들과 닮아 보여 많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작은 킬링 필드라고 하는 왓트마이 사원에 도착했다.
캄보디아에서 일어났던 킬링필드 시기에 학살 당한 이들의 유골을 모아둔 탑이있는 곳이다.

 


킬링필드 [Killing Fields]


1975년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이던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정권이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린 후
1979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최대 20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한 사건이다.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1975년 4월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약화된 캄보디아의 친미 론 놀 정권을 몰아냈다.
당시 폴 포트가 정권을 잡자 론 놀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환영하였다.
그러나 폴 포트는 새로운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론 놀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려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만 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크메르루주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들의 만행은 캄보디아 뉴욕타임스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의 글,
'디스프란의 생과 사(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글은 1980년 뉴욕타임스에 실렸고 쉔버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이를 토대로 학살된 양민이 매장된 곳을 뜻하는 <킬링필드>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한편 2011년 11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공동설립한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는
크메르루주 2인자였던 누온 체아 등 크메르루주 정권의 핵심인사 4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이들은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학살, 고문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2010년 7월 투올슬랭 교도소 소장이었던 카잉 구엑 에바브는 징역 30년형을 받아
전범에 대한 단죄가 시작된 바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 정권 1인자인 폴 포트는 앞서 1998년 재판을 받지 않고,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유골을 모아둔 탑앞에 섰다.
여전히 이런 역사의 현장 앞에 서면 가슴이 아픈 것 뿐아니라
어떤 분노가 느껴진다.
한사람의 미친 지도자가 끼치는 해악에 대해...

 

 

폴 포트

 

 

학살 당시의 모습들...

 

 

옆에는 사찰 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
가족 중 누군가가 여기에 있는 걸까?

 

 

몇년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 갔을때
벽에 걸려있었던 사진 속의 어린 소년 소녀들의 너무도 슬픈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런 슬픈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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