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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16 이탈리아

아시시(Assisi)

by 포도주빛 바다 2016.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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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서 아시시로 접어드는 길에 멀리 언덕에 도시가 보인다.

저곳이 바로 아시시란다. 성프란시스코로 유명한...


멀리서 보기에도 규모가 꽤 커보인다.



아시시 [Assisi]

토피노강() 유역과 키아시오강() 유역에 솟아 있는 아펜니노산맥의 수바시오산() 중턱에 있어

움브리아 평야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볼 수 있다.

성()프란체스코 및 성녀() 클라라가 탄생한 주요 가톨릭 순례지의 하나이다.

로마제국 시대부터 번영한 시장도시이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가는 굴곡이 심한 좁은 가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중세시대 초기는 스폴레토 공작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12세기에 자치지구가 되었다.

페루자와의 알력으로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그후 교황령에 속하게 되었으며,

1860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13세기에 건축된 로마 고딕양식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는 지오토(Giotto)가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주제로 그린 것을 비롯하여

조반니 치마부에(Giovanni Cimabue)와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등이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예배당이 1997년 지진으로 심한 손상을 입었으나,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1999년 재건되었다.

그밖에 산타마리아 델리안젤리 성당(1569∼1679)과 산타키아라 교회(1257∼1265), 산루피노 대성당(1140),

라로카마조레 요새(1367) 등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아시시 [Assisi] (두산백과)


주차장에 들어서니 높은 언덕위에 성프란체스코 성당이 보인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1182년 아시시에서 부유한 직물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쟁 포로로서의 체험 그리고 심하게 앓았던 중병은 프란치스코의 내적인 생활에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 위기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재물을 포기하고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내용의 설교를 들음으로써 극복되었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방문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교황은 구두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규칙을 승인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이 구두 승인만으로도 만족하였다. 그는 서면상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사이 급성장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219년 수도회의 과제로 선교를 채택하였다.

프란치스코 스스로 선교를 위해 동양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프란치스코가 선교 때문에 자리를 비운 사이 수도회 내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많은 수도승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여 수도회가 추구하는 가난의 이상을 엄격하게 준수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1221년 수도회의 잠정적인 규칙을 작성했으나,

이 잠정적인 규칙은 1223년 최종적인 규칙을 통해 대체되었다.

나중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으로 선출된 우골리노(Hugolin) 추기경이

이 규칙의 작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우골리노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확고한 형태로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가 추구하는 가난의 이상을 완화시키려는 시도 때문에 괴로움을 겪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의 삶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맡기신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순종과 가난의 이상은 교회에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알비파 교도들과 발도파 교도들이 가난의 이상을 폭력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실천하려고 시도했고,

그래서 교회와 성직자들을 가혹하게 비판했지만,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은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고 교회에 순종하였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쇠퇴의 위기에 직면했던 교회를 구하는 데 기여하였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별세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Franz von Assisi] (교황사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에스컬레이터에선 찌익직 거리는 기계소리가 들린다.

그만큼 오랜 된걸까?



아시시로 들어가는 입구






움브리아 평야




산타 키아라 광장



산타 키아라 성당


산타키아라 대성당

1255년 8월 15일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클라라를 시성했다.

1260년 클라라의 이름을 딴 산타 키아라 대성당이 완공되었으며,

그 해 10월 3일에 클라라의 시신이 새로 완공된 대성당으로 옮겨져서 중앙 제대 아래에 매장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클라라의 공로를 높이 사,

1263년 가난한 자매회의 명칭을 성클라라 수도회로 공식적으로 변경했다.

그로부터 약 600년이 지난 1872년 클라라의 유해는

산타 키아라 대성당의 지하에 새로 지어진 봉안실로 이장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성당앞 광장에서 젤라또 한개씩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니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일단 들어가 보자구요...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는 거리의 모습이 아름답고 평화롭고

그래서 사람들을 절로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드디어 그 유명한 프란체스코 성당의 모습이 보였다.

이젠 입장이다.


성프란체스코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성프란체스코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이 성당은 이 곳에서 태어나 프란체스코수도회를 창설한 성()프란체스코를 기리어 세워진,

프란체스코 수도회 최초의 성당이다.

1228년에 기공하여 1253년에 완성된 이 건물은 비탈이 많은 지형을 살려

상하 두 쌍으로 된 진기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고딕풍 성당의 특색인 비교적 요철()이 적은 간결한 외관과

첨두교차궁륭(窿)으로 구성된 내부의 구조 등,

모두가 기본적으로는 고딕 양식의 흐름을 잇는 것이나,

T자형의 플랜과 측랑()을 없앤 폭넓은 단랑식() 회당부()의 구상과 개방적인 내부공간에서, 의식()보다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설교를 중시한 교단()의 의도를 잘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형식은 그 뒤에 계속 세워진 각지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의 모범이 되었다.

밖으로 드러나게 나타나는 장식다운 장식을 찾아볼 수 없는 대신,

피에트라 아시시(아시시의 돌)라고 불리는 이 지방 특산의 담홍색 용재()가

야코포 다 아레만니아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성당 전체를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다.

또한 상하 양당()의 내벽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를 앞선

13∼14세기의 프레스코그림이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상당()의 지오토가 그린 연작 시리즈 벽화가 있으며

이중에《작은 새에게 설교하는 성()프란체스코》가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프란체스코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聖堂] (두산백과)




드디어 입장을 하기 위해 입구에 섰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핫팬츠를 입고 왔는데 반바지는 입장 금지라고 냉정하고 단호한 표정의 이탈리아인 경비원이 제지를 한다.

헉~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럽다.

나말고도 몇몇 아가씨들이 반바지 민소매 차림이었는데..

이리저리 가디간이나 스카프를 빌려 둘둘 감고 가려보지만 여전히 맘에 안드는 모양이다.

이스탄불에서 블루 모스크 입장시에도 보자기나 스카프를 미리 준비해서 빌려주는 친절을 베풀던데...

그 먼곳에서 이곳을 찾아 온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이곳의 예의라고 하니 두가지중 한가지를 선택해야했다. 포기 아니면 불법...ㅋ

다행히 이러저리 붙잡아 매고 내리고 가려서 겨우 통과를 명 받았다.

아마 이날 아침에 부인과 대판한 경비원이 과잉 제지를 한건 아닐까 싶어져서 웃음이 나왔다.


성당 팡 잔디에는 T자형의 십자가와 PAX라는 글자가 조경되어있었다.

아마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평화를 누리라는 뜻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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