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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나라보기/2015년 이후

잃어버린 백제를 찾아서-부여

by 포도주빛 바다 201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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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내친집에서 우연히 보고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벼루던 곳이었다.

일년에 몇번 따라 갔던 서울대 우리문화탐사회에서 나온 올해 일정을 보면서

너무 반가워 기대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국립부여문화제 연구소였다.

 

 

연구원 한분이 나오셔서 백제의 수도 부여에 대해 설명한다.

차분 차분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박물관에서 수많은 유물들을 만났지만 마음에 와닿는 느낌은 많이 다르다.

 

 

이번 전시의 주제란다.

 

 

사진으로 만나는 부여의 모습은 오래전의 모습과 사뭇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백제 시대에도 지금과 그닥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했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 되었다는 와당의 모습이 정말 예쁘다.^^

예쁘고 다양한 막새의 모습에 놀랍기만 하다.

 

 

꼭 찍어놓은 떡 처럼 보인다. ㅋ

 

 

너무 작은 여인상은 마야부인일 것이라고 추정한단고 했다.

갑자기 집에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사진도 제대로 못찍고 설명도 더 이상 듣지 못했다.ㅜㅜ

 

신동엽 시비

 

 

 

 

가는 길에 신동엽 시를 잠시 음미하고~

 

 

그리고 세번째 도착한 곳이 궁남지였다.

아직 연꽃이 필 시기가 아니라 아쉽다고 했는데...

이곳은 비오는 날 오면 정말 운치있고 아름답다고 했다.

더우기 새벽옄 안개가 올라올때가 최고라고 했다.ㅎㅎ

 

그래서 연꽃이 피어나는 한여름 비가 내리는 날 오후에

이곳에 와서 술한잔을 하는 걸루~

 

 

 

부여 궁남지[扶餘 宮南池]

궁남지는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주변이며 사적 제135호이다.

궁남지의 역사는 삼국사기 백제 무왕조에 기록이 남아있다.

즉 “무왕 35년(634)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또 같은 왕 “39년(638) 봄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한다.

현재의 궁남지 모습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3년간에 걸쳐 내부를 준설하고,

가장자리의 언덕은 흙을 쌓은 후, 수양버드나무를 심은 결과이다.

현존한 궁남지는 13,000여 평이며,

그 주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토사를 매몰하여 경작지로 이용한 것이다.

정비 이전의 궁남지 모습은 수만 평이 넘는 늪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남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0년, 1991-1992년, 1993년에 간헐적인 조사가 있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궁남지 내부 및 주변에서는 목조 및 점질층으로 구성된

집수장시설, 수로, 건물지 등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궁남지는 그 규모와 정확한 호안의 구조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조사작업의 진행에 따라 규모와 좀 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고학사전, 2001. 12., 국립문화재연구소)]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 앞서 만들어져서

안압지의 모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단다.

 

 

 

 

 

 

 

 

 

 

 

 

 

 

 

 

 

 

 

 

 

 

 

 

연꽃이 만개하면 더 없이 아름겠다.

 

 

 

 

 

 

 

부소산성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부여의 북쪽인 쌍북리(현: 관북리)에 있는

해발 100m쯤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구릉이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이 막아선 형상이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이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그래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 방식을 보여 준다.

이 부소산에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 605년에 고쳐 다시 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부소산성 안내도

 

 

오른쪽 길을 따라 한바퀴를 도는데만 1시간 넘게 걸린듯하다.

 

삼충사(三忠祠)의 3충신인

 

 

삼충사의 세분

제일 오른 쪽이 계백장군이라고 했다.

 

 

삼충사()

부소산성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삼충사()가 있다.

백제 말의 3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데 1957년에 처음 세워졌고

1981년에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삼충사 입구

 

 

사당은 오른쪽에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오는게 예의상 맞다고 하신다.

그래서 모두들 왼쪽 문으로 나오는게 보인다.

 

산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성길

 

 

테뫼식 산성길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토석혼축식이다.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2,2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사적 제5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영일루

 

 

영일루

삼충사에서 5분 남짓 더 걸어가면 있는 영일루는

사비성의 동대()가 되는 영일대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 건물은 1964년에 홍산에 있던 홍산문루를 옮겨 지은 것이다.

부소산의 동쪽 산봉우리이니만큼 아침 해뜨기를 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해 맞는 곳’으로 이름이 붙었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군창터

 

 

군창터

영일루 아래쪽으로는 군창터가 있어 너른 터에 철책을 둘러 놓았다.

백제 때에 군대 곡식창고였다고 한다.

지금은 잔디를 심어 놓았지만,

땅속을 파면 불에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저항하던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15년에 한 초등학생이 칡뿌리를 캐다가 처음으로 발견했다니

땅속에 묻힌 지 1,250년 만의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사자루(泗疵樓)

 

 

사자루(泗疵樓)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는 사자루()가 있다.

한자가 ‘사비’()와 비슷하나 왜 사자루가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백제 때에는 송월루()가 있었으니 해맞이 영일루와는 반대로 달을 보내는 곳이다.

지금 건물은 1919년에 당시 군수가 임천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뜯어다 짓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현판 ‘백마장강’()의 시원하고 힘찬 글씨는

근대 서예의 한 봉우리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사자루에서는 부여시내가 부채꼴 모양으로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백화정

 

 

백화정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힘들지 않은 걸음이라도 땀이 났을 만한데 백마강 강바람에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부소산성에 오르는 이들은 대개 여기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실은 그 바로 아래 나무 모양의 난간을 두른 자리가

백마강이 휘돌아 가는 모습이 배경으로 더 근사하게 잡히는 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낙화암[落花巖]

충청남도 부여군의 부소산() 서북쪽으로 백화정() 아래에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는 벼랑으로 되었고, 그 아래에 백마강이 있다.

백제 의자왕 때 당나라 군사가 침략했을 때 이곳에서 3,000 궁녀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는 바위로 꽃이 떨어진 바위라 하여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달아나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였다.

이곡의 시에 "청구() 정기 모여 황하()에 응하니, 온왕()이 동명()의 집에 태어났네.

부소산() 아래로 옮겨 나라 세우니 견고한 성곽이 하루아침에 와해되고,

천척 높은 바위 낙화()로 이름짓다."라고 노래하였다.

『여지도서』에는 "낙화암은 관아의 북쪽 1리에 있다.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자, 궁녀들이 급히 달아나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에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뜻으로 낙화암이라고 이름 했다."라고 적혀있다.

『해동지도』(부여)의 현내면에 고란사, 부소산, 백마강과 함께 그 이름과 형세가 기록되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고을 북서쪽에 낙화암이 묘사되어 있다.

낙화암은 백마강 가에 묘사된 절경의 산지에 위치해 있으며 고란사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 앞을 흐르는 백마강에는 조룡대와 구암진()이 나타난다.

또한, 낙화암은 반월성(), 대왕포(), 고란사, 삼충사() 등과 함께 8경에 속한다고 지도의 아래쪽 여백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현내면 고적명소에 낙화암이 있는데 부소산 뒤에 있으며, 백제 시대 궁녀들이 나라가 망한 것을 탄식하며 이 바위에 올라 강에 몸을 던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落花巖, Nakhwaam]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국토지리정보원)

 

 

백화정 아래 난간에서 백마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바로 이렇게~

 

고란사[皐蘭寺]

 

 

고란사[皐蘭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사비성()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마강 유람선

 

 

 

유람선을 타기 위해 고란사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백마강 유람선을 탔다.

스피커에서 꿍짝꿍짝~ 노래가 흘러나온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헌데 가사가 재미있다. 황산벌...어쩌구...ㅋ

 

낙화암

 

 

 

 

 

사진을 잘 못 찍어서 낙화암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정림사지에 왔다.

 

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

 

 

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 낙양성() 내의 황궁과 영녕사()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의 평제기공문(),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으며,

다수의 소조인물상편()과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및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림사지 오층석탑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바라 보았다.

 

 

문외한이 내가 봐도 균형감 조형감 ...뭐 이런게 느껴진다.

 

금당 안의 불상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扶餘定林寺址石造如來坐像]

불상의 신체는 심한 화재로 극심하게 파괴된 데다

오랜 세월 마멸되어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이 신체에 비해 크고 균형이 맞지 않는 것도 이들이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팔과 왼쪽 무릎은 완전히 없어졌으며 남아있는 부분으로 미루어 어깨와 가슴이 빈약하여

신체가 왜소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부 표현은 거의 알아볼 수 없으며, 비교적 밋밋한 신체와 어색한 비례를 지닌 불상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왼팔이 가슴 쪽으로 올라간 모습이므로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불상이 안치된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대좌로 통일신라시대에 흔히 보이는 것이다.

활짝 핀 연꽃[앙련()] 모양의 상대석과 안상()이 조각된 8각 중대석,

엎어진 연꽃[복련()] 모양의 하대석으로 이뤄졌다.

대좌 역시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 형식은 알아볼 수 있다.

하대석을 받치는 지대석에도 각 면마다 3개씩의 안상을 새겨 복잡하고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좌가 분명하게 통일신라의 전형을 하고 있어, 현재 불상의 대좌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명문기와에 새겨진 대평 8년은 1028년(현종 19년)으로 이때 사찰을 크게 중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석불좌상은 사찰 중수 때 제작된 불상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능산리고분군[ 扶餘陵山里古墳群 ]

 

 

능산리고분군[ ]

고분군이 위치한 곳의 지형은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에 해당되는 능선이

각기 돌출되어 있고 전방에는 하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또 뜰을 건너 남쪽 전방에는 주작()에 해당하는 안산()이 솟아 있으며

그 너머로는 백마강이 보이는 풍수지리적인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형국이다.

고분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밑지름이 20∼30m이며 봉토자락에 호석()을 설치한 것도 있다.

제1호분은 3단 70㎝로 쌓았고 제4호분은 할석 1단만을 세워서 둘렀다.

내부구조는 연도()가 붙은 횡혈식석실분으로 개석 이하를 모두 지하에 조영한 완전한 지하석실분이다.

석실의 구조형식은 축조재료와 천장가구형식에 따라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석실의 수직벽 위에 판석을 바로 올려놓은 납작천장식 석실분으로 제1호분이 여기에 속한다.

현실()의 사면벽과 천장은 각 면에 거대한 판석 1매씩만을 사용하였다.

연도는 전후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현실에 가까운 안부분은 현실과 같이 동서 두 벽과 천장을 판석 1매씩만으로 조립하였고,

바깥부분은 할석으로 축조하고 벽면에는 두껍게 회를 발랐다.

바닥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서 현실의 관대()와 연도의 앞부분에

같은 방식으로 깔았다.

관대는 조영 당시에는 1인용으로 계획했다가 변경해 2인용으로 확대하고 독립관대로 만들었다.

현실 입구는 거대한 판석 1매를 세워서 막고,

연도 입구는 바닥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전석()을 쌓아 올려 막았다.

또 현실의 벽면과 천장에는 돌의 표면을 물갈이[]한 후,

그 위에 주·황·청·흑색의 안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동벽에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에 주작을 각각 그린 사신도가 있고,

천장에는 연화문과 흐르는 구름무늬가 배치되어 있다.

둘째, 제2호분과 같은 형식으로 장대석()이 있는 굴식천장석실분이다.

평면은 제1호분과 비슷하나 벽체와 천장축조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재료는 판석대신 면을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해 천장을 송산리 제6호분이나

무령왕릉()과 같이 굴처럼 곡면을 이루게 하고 벽면 전체와 천장에는 두껍게 회를 발랐다.

바닥은 제1호분과 같이 모전석을 사용했으나,

제1호분에서와 같은 독립관대가 아니고 무령왕릉과 같은 전면관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1972년에 굴토작업 중 당초의 배수로가 발견되었다.

연도의 전방에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지면의 단면이 V자형이 되도록 파고

그 안에 자갈과 모래를 채운 뒤 모전석을 덮어 나가는 형식이다.

외부 배수로의 이러한 형태는 능산리고분에서는 일반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제3호분과 같은 형식인 천장이 꺾임식[]으로 된 판석조석실분이다.

벽면은 제1호분과 같이 각 벽면을 1매석으로 하고,

벽석 상면에 장대석을 길이로 옆으로 반쯤 뉘어 사면()을 만들고,

그 위에다 판석 1매를 올려놓아 천장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연도부분은 변화없이 납작천장으로 했고 길이도 대단히 짧다.

관대는 긴 판석 2매를 나란히 놓아 쌍관대를 만들었다.

이 고분군은 일찍이 도굴을 당해 부장품은 거의 없어졌으며 다만 도굴자들이 버린 파편 몇 점만이 검출되었다. 제5호분에서는 관대 위에서 두개골 파편, 칠()을 한 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

금동화형좌금구() 등과 2호분에서 출토된 칠기편() 다수와

금동원두정()뿐이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지극히 적은 일부 파편에 지나지 않지만

그 공예기술만은 상당히 발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장법()은 관대의 수와 크기로써 짐작할 수 있다.

제1·2·3호는 합장()이고 5호는 단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북침()이고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모형 전시관

 

 

 

 

오늘은 여기까지...

귀경에 대한 부담으로 박물관은 패쓰하고 서울로 차를 돌렸다.

오랜 만에 만나는 즐거운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잃어버렸던 백제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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