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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16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by 포도주빛 바다 2016.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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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Milano]

포강의 지류인 티치노·아다두 하천 사이의 비옥한 평야부에 자리한다.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발달한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이다.

켈트인의 취락에서 기원하여 로마시대에는 메디올라눔이라고 불리는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374년에 성()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면서부터 밀라노는

북부 이탈리아의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성()암브로시우스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밀라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5~6세기에는 훈족 고트족의 침입으로 시가지가 파괴되고, 다시 랑고바르드족의 점령하에 들기도 했다.

샤를마뉴의 치하()에 들게 된 무렵부터 밀라노 대주교의 권력이 강대해지고,

따라서 전란을 피하여 성벽으로 둘러싸인 밀라노로 몰려드는 인구도 증대하여,

11세기에는 롬바르디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16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시가지가 파괴되었으나,

밀라노는 롬바르디아동맹에 가담하여, 1176년 레냐노 싸움에서 황제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 뒤,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은 다시 서로 반목하게 되고,

또 밀라노에서도 여러 세력이 분열하여 기벨린당()과 겔프당의 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밀라노에서는 직물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또 근교의 농촌에서는 토지개량이 진척되어,

롬바르디아에 있어서의 밀라노의 경제력은 다른 도시들을 크게 압도하였다.

1277년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은 비스콘티가()가 밀라노의 영주가 되어, 그 후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1447년 그 집안의 남계후손()이 끊길 때까지 밀라노에 군림하였다.

3년의 공화제() 뒤에, 비스콘티가의 장군이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영주가 되어,

그 후 1535년에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가기까지, 스포르차가의 지배가 지속되었다.

그 동안 대성당의 건축이 진척되고, 운하가 개통되는 한편, 브라만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을 비롯한

문인·예술가들이 이 도시에 모여들어 밀라노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 후 에스파냐·오스트리아·프랑스의 지배를 거쳐, 1861년에 이탈리아왕국에 통일되었다.

1714년의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까지 지속된 에스파냐 지배시대와 나폴레옹 지배시대(1796∼1814)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통일까지 지속된 오스트리아 지배시대에 밀라노는 경제적으로 번영하여,

롬바르디아 상인()이 유럽 각지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밀라노는 이탈리아 역사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지위는 상실하고 있었다.

밀라노의 근대공업은 19세기 후반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섬유공업의 바탕 위에, 1880년대에는 알프스 산록의 수력발전을 기초로 하여,

금속공업·화학공업·기계공업 등의 중화학공업이 발달함으로써,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공업지대는 시의 북부, 그리고 북부교외에서 서부·동부교외로 발전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대도시권(인구 404만)을 형성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공업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으나, 특히 화학·섬유·기계공업이 두드러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가지의 많은 부분이 폭격의 피해를 입었으나,

중앙역()을 중심으로 한 지대는 근래 고층건물이 줄을 지은 오피스가()로 변모되고, 지하철도 정비되어, 로마와는 다른 근대적인 상공업도시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밀라노의 많은 역사적인 건조물 가운데 4세기 말에 창설된 성()암브로시우스성당,

백대리석 고딕양식의 밀라노대성당, 브라만테의 손이 가해진 성()마리아성당과 그 성당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벽화 《최후의 만찬》 등이 유명하다.

문화의 중심지로 오페라극장인 라스칼라극장, 4개의 대학, 많은 미술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라노[Milano] (두산백과)



밀라노에 도착했을땐 하늘이 흐려있고 간간히 비가 뿌리는 듯하다.

그 흐린 하늘에서 다시 밀라노 두오모 성당을 만났다. 세번째 만남이다.

만날 때 마다 조건과 상황은 다르지만 그래도 고딕 성당의 위엄은 여전하다.



밀라노 대성당[Milan Cathedral]

1386년, 대주교 안토니오 다 살루초는 옛 로마 유적지—밀라노의 정중앙 지점으로

모든 주요 도로가 이곳에서 뻗어나가는—자리에 십자형 네이브와 트랜셉트로 이루어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로 인해 고딕 양식이 알프스를 넘어 북구에서 이탈리아 본토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500년 가까이, 때로는 재정상의 문제로, 때로는 설계상의 문제로

큰 진척 없이 공사는 더뎌지게 된다.

그 결과 건물의 외양은 시각적 모순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육중하면서도 섬세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영감이 빛을 발한다.

수많은 피너클에 플라잉 버트레스, 복잡한 격자무늬 창살로 장식한 동쪽 앱스는 프랑스 고딕 스타일,

팔각형의 르네상스 쿠폴라, 17세기 양식의 복도, 18세기 스타일의 스파이어, 거기에 신고전주의 파사드까지.

스파이어와 가고일, 대리석상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지붕은 도시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엄청난 규모—축구 경기장의 1.5배 넓이로 약 11,706제곱미터에 달한다—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 다음으로

가톨릭 대성당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

다섯 개의 아일이 입구에서 제단까지 이어지고, 거대한 석조 기둥이 네이브를 지배하는 실내는

4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 있다.

벽과 벽감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각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데,

총 3,159개의 조상() 중 2,245개는 건물 외부에서만 볼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조각상은 '작은 성모'라는 뜻의 <마돈니나(Madonnina)>로

가장 높은 스파이어 위에 서 있으며 3,900장의 금박으로 덮여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라도 대성당 [Milan Cathedral]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두오모 광장에는 공연 행사가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로 북적 거리는 모습은 처음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마상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Vittorio Emanuele II]

184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지고 퇴위한 부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뒤를 이어

 사르데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부왕이 도입한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며 다제리오 ·카부르 등을 수상으로 기용하여

행정 ·재정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르데냐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와 협조외교를 맺는 한편, 크림전쟁에 참전하여 국제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였으며,

185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롬바르디아를 획득하였다.

1860년 가리발디의 남()이탈리아 원정 뒤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병합하였으며,

1861년 3월 초대 이탈리아왕이 되었다.

1866년에 베네토, 1871년에 로마를 병합하여 이탈리아의 통일을 완성함으로써

국부()·성실왕()이라 불리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Vittorio Emanuele II] (두산백과)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갈레리아

두오모대성당의 정면에 있은 쇼핑몰이며, 이탈리아 유명한 브랜드의 상점들이 즐비하다.


갈레리아 입구 사진이 빠져서 어쩔 수 없이...^^


갈레리아 내부


구멍에 발 뒤축을 넣고 돌려서 한번에 한바퀴를 돌리며 소원을 빌고 성공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지 성공하는 사람을 못보았다.


갈레리아 중앙의 천정



갈레리를 통과해서 밖으로 나오면 바로 스칼라 극장이 보인다.




스칼라극장[La Scala Theatre]

1776년, 화재로 밀라노의 주요 극장이었던 테아트로 두칼레가 소실되었다.

극장 지분을 갖고 있던 이들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고 있던 이 도시의 수장에게

새로운 극장을 지어 달라는 청원을 올렸고,

마침내 훨씬 더 웅장한 극장을 짓게 하라는 명이 내렸다.

새 건물은 1778년 개관했으며, 이 건물을 지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축성을 거두어들이고

철거했던 산타 마리아 스칼라 교회의 이름을 따 스칼라 극장이라 이름 지어졌다.

건물을 짓는 비용은 부유한 밀라노 시민들에게 거둬들인 개인 오페라 박스석,

즉 '팔치' 가격으로 충당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예전 극장에서도 박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곧 '라 스칼라'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이 극장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으며,

널따란 광장을 향해 지어진 훌륭한 파사드가 그 특징이었다. 대강당은 3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메인 플로어(플라테아)에서는 청중들이 서서 공연을 관람했으며,

그 위쪽으로 부유한 후원자들 전용으로 각기 화려하게 꾸며진 박스석이 있었다.

이 박스석 위에는 가장 열렬한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널따란 갤러리(로지오네)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공연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며 소리 높은 야유가 재빠르게 터져 나오곤 했다.

라 스칼라는 상류 사회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지만 이 극장의 자랑거리는

항상 위대한 음악가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를 상연하는 장소였다는 점이었다.

라 스칼라는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다툼이 있기도 했지만 베르디의 작품도 많이 상연했다.

20세기 초에는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나비 부인>과 <투란도트> 등 푸치니의 작품을

라 스칼라에서 초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폭격으로 손상되기는 했으나,

새로이 단장한 이 오페라 하우스는 당대의 일류 작곡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베리오와 스토크하우젠 등 아방가르드 음악가의 작품을 상연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칼라극장[La Scala Theatre]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스칼라 극장 앞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이 보인다.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흐려진다.

비 맞지말고 밥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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