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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16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by 포도주빛 바다 2016.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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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Firenze]

로마 북서쪽 233km, 아르노강()의 양안(), 구릉과 선상지 상에 있다.

근교의 아르노강 연변의 저지는 신흥공업지대로 상공업의 중심을 이룬다.

근대적인 대도시로서 아르노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역사는 BC 10세기 무렵의 취락 빌라노바에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도시로서의 발전은 BC 2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부터 뻗어오는 카시아 가도()의 중심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당시에 계획적으로 건설된 부분은 현재의 시가 중심부와 일치하며

폰트베키오(다리)의 우안()에 해당한다.

제정()시대에는 토스카나·움브리아의 중심이 되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는

백작령()의 중심이 되었으나,

11세기 후반 마틸데의 시대까지 도시의 발전은 정체()상태였다.

마틸데 사망 후 12세기 전반에 코무네로서 독립하고 좌안의 보루고 지역을 병합해서 발전하였다.

12세기 무렵부터 산업,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전하여 많은 직물상인이나 귀금속상인이

각기 조합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번영하였고 피렌체는 유럽의 상공업·금융업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교황당(:겔프)과 황제당(:기벨린)과의 싸움이 피렌체시()뿐만 아니라

전()토스카나 지방, 나아가서는 전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이때 피렌체는 피사 등의 인근도시를 지배하여 강대한 공화국이 되었다.

1300년에 비롯된 백당()과 흑당()은 단테를 망명하게 하였으나,

이 무렵의 피렌체는 이미 인구 10만을 헤아렸고,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이탈리아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가 시정()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시모 및 손자인 대()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되어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까지 인구는 10만 이하에 머물렀다.

1859년 토스카나 공국은 사르데냐 왕국(뒤의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고

1865년부터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격심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1944년 8월에는 영국·독일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로 참화를 입었다.

상공업이 성하며 식품·의료·가구 등의 일용품공업 외에 자동차부품·자전거·냉장고·농업기계 등의

제조공업과 전통적으로 이름높은 가죽제품공업이 이루어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시정()의 중심이었던 시뇰리아 궁전을 비롯하여,

지금은 국립미술관·도서관·고문서관()이 들어 있는 우피치 궁전,

독특한 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교회, 조토의 벽화 등으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 교회,

도나텔로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산 로렌초 교회 등이 있는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도 같다.

한때 메디치가()의 저택이었던 팔라초-피티(궁전)는 현재 미술관이고,

그 밖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름높은 아카데미아 미술관,

바르젤로 미술관이라는 통칭으로 알려진 국립미술관,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산마르코 미술관 등이 있다. 또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기관 ·연구기관이 모여 있다.

1966년 가을에 아르노강이 범람, 우피치 궁전 등 시가의 중심부가 침수되어

귀중한 문화재가 큰 손실을 입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렌체[Firenze] (두산백과)



지난 일주일 내내 맑은 날 속에 여행을 했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날...

더위에 지칠만해졌는데 우리가 피렌체에 도착할 무렵부터 비가 솔솔 뿌리기 시작한다.

오히려 내리는 비를 보며 감사했다.

생각해보니 피렌체에 올때마다 비가 내렸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 전경


아르노강에서 접어드는 골목길에서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며 걷느라고 사진기를 차에 두고

작은 똑딱이 하나 달랑 들고 내렸다.

세번째 방문이기도하고 우산 쓰고 사진 찍는 번거로움도 피하고...

가볍게 산책하듯 피렌체를 둘러보고 싶었다.


산타크로체 교회



산타 크로체 교회

두오모와 함께 꼭 방문해야 할 곳은 산타 크로체 교회이다.

산타 크로체 광장에 면한 소박한 고딕 양식의 이 교회는 칸비오 설계에 의해 1294년에 세워진 흰색 건물이다. 이 교회에는 많은 음악가, 문호, 조각가 등의 묘 또는 영묘가 있다.

피렌체 사람들은 이 교회에 묻히는 것을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단테와 동렬에 오르는 것이라 생각해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

남쪽 첫 기둥 가까이에 단테의 영묘가 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라벤나의 산 프란체스카 교회에 묻힌 그의 유골은

라벤나 측의 거부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피렌체 사람들은 단테의 영혼만큼은 이 영묘에 있다고 믿고 있다. 1839년 리치의 작품이다.

다섯 번째 기둥이 있는 곳에 로시니의 묘가 있다.

1792년 아드리아 해에 면한 항구 도시 페사로의 두오모 가에서 태어나 1868년 파리 교외에서 세상을 떠난

로시니는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는데, 유언에 따라 1887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로시니의 작품들 가운데 피렌체에서 초연된 것은 한 곡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로시니는 토스카나 대공이 자신을 피렌체에 초청해 최고의 예를 갖추어 접대한 것에 감동하여

타향임에도 항상 예술의 도시 피렌체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로시니 묘 가까이에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묘가 있다.

그의 묘비 면에 유명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정치 철학자 마키아벨리의 묘도 바로 이곳에 있다.

제단에 있는 조토의 프레스코화와 스텐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

교회 오른쪽에 박물관이 있고 그 정면에 세례당이 있는데,

이 세례당은 피사의 것과 같이 잔음이 길게 남아 도·미·솔을 부르면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어 울려온다.

산타 크로체 광장은 피렌체의 발전과 함께 여러 용도로 쓰여 왔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이 모여 대화를 나누던 장소였지만, 기독교의 설교장으로,

15세기에는 마상 창술 시합장, 그 이후로는 축구장으로 열광적인 팬들이 모였으며,

최근에는 관광 버스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타 크로체 교회(유럽 음악도시 기행, 2006. 1. 16., 시공사)




단테의 동상



지난번 두번의 방문에서 본적 없던 교회...

이곳에 단테의 가묘와 미켈란젤로의 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선 꼭 사진을 멋지게 잘 찍고 싶어서 후배에게 카메라를 건네는 순간

돌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헉~

찌그러진 카메라의 이상한 메세지에 더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가방에 넣어으며 아쉬운건 망가진 카메라가 아까운 것보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아쉬움 이었다.


그래서 피렌체에서는 더이상의 사진이 없다.ㅜ.ㅜ


<피렌체는 2006년 서유럽과 2009년 서유럽 여행 폴더에 가시면

비오는 여름의 피렌체와 2월의 피렌체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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