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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17 북독일과 베네룩스

독일-베를린 2

by 포도주빛 바다 201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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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중앙역


베를린의 트램

노란색 트램이 너무 귀엽다.




점심식사와 맥주 한잔






조금전까지 멀정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또 멀쩡히 비가 그치고...

그래서 그런지 이동네 사람들은 우산을 거의 안들고 다닌다.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비가오거나 말거나 비가 오면 모자 쓰고 

그냥 자전거로 내 달리는게 일사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땡큐~ 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의 정책 덕분에 독일의 통일에 도움이 되었다고 

이렇게 감사의 맨트를 바닥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은 없어졌지만 장벽이 있었던 흔적은 지우지 않았다.

이렇게 벽돌 두줄로 바닥에 표시에 그것을 기억하게 만들어 두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브란덴부르크문 [Brandenburg Gate]

독일 베를린의 중심가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에 있는 건축물로 

운터덴린덴로(Unter den Linden)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독일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으며 독일 통일과 함께 독일과 베를린의 상징이 됐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Friedrich Wilhelm II)의 명령으로 1788년에서 1791년에 걸쳐 건축됐다.

프로이센 제국의 건축가였던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가 설계했다

초기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26m, 가로 길이는 65.5m 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정문인 프로필라에(Propylaea)를 본따 설계한 것이다

문 위에 올려진 '승리의 콰드리가'는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Johann Gottfried Schadow)가 조각한 것으로 

네마리의 말이 승리의 여신이 탄 마차를 끄는 모습을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의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전소되지 않고 남았다

전쟁이후 1956년 부터 약 1년동안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독일 분단 시절에도 일반인들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협정됐으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허가 받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서만 동·서 베를린을 왕래할 수 있게 됐다.

 

198911월 약 10만 여명의 인파가 이 문 앞에 운집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독일 통일과 함께 1990년 서독 정부가 이 문의 보수공사를 시행했다

2002년 독일 통일 12주년을 기념해 보수공사와 함께 검게 그을린 자욱을 지워내는 등 새단장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일에서 발행하는 우표와 주화에 등장했던 이 문의 모습은 

현재 독일에서 주조하는 50센트 유로화에 새겨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성급 호텔 아들론



브란덴부르크 문 넘어 베를린 전승 기념탑이 보인다.



마차와 마부가 인상적이다.




차한잔 마시러 들어갔던 건물안 서점에서



나중에 알았지만 대학 건물이란다.



미술대학이라고 했던가?




자전거 도로





ㅎㅎㅎ 유명 초콜렛 하우스



다음날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이라 임시휴일이 되었단다.

그래서 이날 저녁 온통 가는 곳 마다 사람들도 붐볐고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따듯한 초콜렛 한잔 마시러 2층으로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오고 말았다.

대신 이것 저것 초콜렛을 사들고 왔느데 생각보다 아주 아주 저렴하고 맛이있었다는..ㅋ










여기까지 Rausch 초콜렛 광고였습니다.ㅎㅎㅎ



유대인학살추모공원



유대인학살추모공원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원으로 

독일 베를린 중심가에 있다. 홀로코스트 기념비(Holocaust-Mahnmal) 공원으로도 알려졌다

19,000 m² 면적의 부지에 2,711개의 콘크리트 비가 세워져 있다

커다란 관을 연상시키는 직육면체의 잿빛 비석들은 가로 0.95m, 세로 2.38m 넓이에 

높이는 0.2m 에서 4.8m 까지 다양하다

비석 주변에는 총 41그루의 나무가 있다

지하에는 면적이 930 m²인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다.

 

내부에는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이름과 개인기록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정보는 이스라엘의 야드 바솀(Yad Vashem)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받은 것이다

박물관에는 전시장, 회의실, 서점 등이 있다

페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설계로 20034월부터 건축이 시작됐다

200412월에 완공되어 20055월에 제막식이 있었다

완공되고 나서 첫 해에 35백만여 명이 방문했으며 베를린의 명소로 꼽힌다

건축 비용으로는 약 25백만 유로가 사용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간 중간 남아 있는 베를린 장벽이 보인다.

저렇게 남겨 두고 기념하는 모양이다.



베를린의 가장 번화가

가장 비싼 빌딩들이 있는 곳이란다.







이건물 사이로 장벽이 지나간다고 했다.


베를린 장벽


서독에서


동독에서


베를린 장벽



베를린장벽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이었다

1961813일 동독이 쌓기 시작한 장벽은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주변 동독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콘크리트로 축조된 장벽을 따라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되었다

동독 정부는 이 장벽을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방어벽이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 서독 정부는 브란트(Willy Brandt)가 베를린 시장 시절 만들어 낸 어법에 따라 

수치의 벽이라고 일컬었다

이름이야 어떻든지 세계인들은 베를린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이 장벽을 떠올렸고

이 장벽은 철의 장막으로 여겨졌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 명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100명에서 200명가량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베를린장벽 건설은 소련의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동독의 사회통일당 제1서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812일 자정 동독군과 경찰이 전격적으로 국경을 폐쇄하고, 철조망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장벽의 길이는 43킬로미터였고, 서베를린 외곽 장벽은 156킬로미터에 달했다

갑작스러운 조치와 더불어 동독 주민 대부분의 서독 방문이 불가능해졌고, 이산가족까지 생겼다

서베를린은 적대 국가에 둘러싸인 섬이 되어 버렸다

브란트 시장을 비롯한 서베를린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사태의 진행을 막지는 못했다.


19626월에는 이미 축조된 장벽에서 100미터 이내에 있던 건물이 철거되고

죽음의 지대(Death Strip)’로 불리던 무인 지대가 만들어졌다

1965년에는 다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지고, 1975년에는 통일 때 붕괴된 형태의 장벽이 세워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량된 4세대 장벽이다

높이는 3.6미터, 폭은 1.2미터였으며, 감시탑은 116개소, 벙커는 20개소에 달했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횡단할 수 있는 장소는 모두 아홉 곳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와 

침머 거리(Zimmerstraße) 구석에 있던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연합국 소속 요원과 외국인만 통행할 수 있던 이 검문소는 오늘날 베를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1987612일 베를린 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Ronald Reagan)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게 

동유럽 진영의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징표로 베를린장벽 철거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레이건 자신을 비롯해 장벽의 붕괴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사건은 갑자기 찾아왔다.

 

19899월 헝가리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동독 주민 13000명 이상이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동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고 서독 대사관을 찾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뒤이어 동독 내에서 대대적인 대중 시위가 일어나자 동독의 최고 지도자 호네커(Erich Honecker)는 사임했다

그런데도 시위는 더 확대되어 갔고, 많은 주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고자 했다

호네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크렌츠(Egon Krenz)는 사태 완화를 위해 

난민들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황이 와전되고 급기야 서독 방문이 즉각 허용될 것이라는 언론의 오보까지 발생했다

이에 고무된 많은 동독 시민이 무력해진 국경 경비대를 뚫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베를린장벽 붕괴는 공식 연표에는 1989119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무튼 이때를 기점으로 시민들은 해머와 곡괭이를 가지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동독 정부도 추가로 국경 초소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포츠담 광장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포함되어 있어 상징적 의미가 더욱 컸다

동서독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린 것은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기지 않은 1222일이었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서베를린 시민을 포함해 서독 주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장벽 철거를 시작한 것은 다음 해인 1990613일이었다

다음 달 1일 동독이 서독 통화를 수용하면서 국경에 대한 통제도 공식 종료되었다

장벽 붕괴의 논리적 결과인 통일은 1990103일에 이루어졌고

역사의 기념물로 남기기로 결정한 약간의 구간과 감시탑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199111월까지 철거되었다. 오늘날 포츠담 광장에 남은 장벽은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독지역 베를린장벽 지하 





장벽 꼭대기에는 사람이 넘어가지 못하게 원통모양을 올려놓았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곳에 다 옮기기 어려움이 아쉽다.



독일이 통일이 되는 데는 동독 지역이었던 라히프찌히 지역 교회의 기도회가 

기폭제가 되었다는 얘기를 우리 교회 목사님을 통회 여러번 들었었다.

이번 여행에서 이곳 현지가이드한테 같은 이야기를 또한번 들으며 

우리에게 필요한것도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을 또한번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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