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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07 중국-상해 외

훙커우공원[虹口公園義擧(홍구공원)]

by 포도주빛 바다 2016.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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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공원(혹은 루쉰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의 호수

 

훙커우공원[虹口公園義擧(홍구공원)]

루쉰 공원은 이전에는 홍커우 공원이라고 불렸고,

청조 1896년에 상하이 공동조계 관청이 있었고, 조계의 밖에 있던 농지를 취득하여 조성되었다.

당초에 공원은 홍커우 오락장이라고 불렸고, 영국 원예가에 의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서양식 정원 양식을 가지고 있다.

원래는 도박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1922년에 홍커우 공원이라고 개칭되었다.

홍커우 공원은 1932년 상하이 히로히토 천황 탄신일(천장절) 기념 행사 때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본제국의 주요 요인들을 암살한 홍커우 의거사건으로 유명하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공원 내의 건물들은 파괴되었으며

1924년에는 일본군의 군사용지로 사용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철수한 1945년에는 장제스에 의해 중정 공원이라고 개칭되었지만,

1950년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아 홍커우 공원이라고 불렸다.

[위키백과에서]

 

 

윤봉길 의사 기념비

 

 

훙커우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홍구공원의거)]

1932년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훙커우공원에서 대대적인 전승기념 및 천장절() 기념식을 가졌다.

김구()의 명령을 받은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은

그해 4월 29일 폭탄장치를 한 물통과 도시락을 들고 일본인으로 가장,

식장에 들어가 오전 11시 40분경 참석자 전원이 묵도하는 시간에 폭탄을 던졌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사령관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즉사하고,

해군 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한쪽 눈을 실명(),

주중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신분을 안 밝히고 자결하려 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어 체포된 후, 일본의 오사카[]로 이송되어

위수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이 거사는 일제를 크게 자극하였고,

일본 관헌은 한국 교포들의 근거지에 난입하여

사건과 무관한 안창호() 등 11명을 검거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만보산() 사건으로 한때 악화되었던

중국 거류 한국인과 중국 관민과의 감정이 호전되고,

교포에 대한 중국인의 환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임시정부는

중국정부로부터 후대를 받게 되었다.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매정

매헌이라는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서 매정이라고 지어진 그의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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