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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07 남유럽

스페인, 똘레도

by 포도주빛 바다 201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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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도 전경>

 

중세도시 톨레도[Toledo]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톨레도는 아랑후에스부터 서남 50킬로미터,

삼면이 타호 강에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5세기 전반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서 고트 족은 579년에 그들 왕국의 수도로 정했고,

711년 이슬람의 침입은 서 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톨레도를 지배하기 시작하여,

1085년 알폰소 6세가 카스티야 전토를 국토회복전쟁을 통해 회복할 때까지의 거의 400년간 지배했다.

이때도 기독교도들은 톨레도를 수도로 정했지만, 대부분의 회교도에게 이곳에 살도록 허락했다.

다시 말하면 이 도시는 중세 스페인을 세우는 데에 유대인,

이스람교인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함께 발자취를 남겨 오늘날까지 도시 전체가 기념물이되고 있다.

펠리페 2세가 1561년에 마드리드로 천도하기까지 톨레도는 스페인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문화도 찬란했다.

그중에서 톨레도에서 태어나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왕이 된 알폰소 10세(재위 1252~1280)는

학문 애호가로, 정치인이라기보다 문화인으로서 뛰어났다.

 

‘태양의 문’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 게랄도 로보를 따라가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먼저 왼쪽 아랫길로 가본다.

왼쪽으로 타호 강이 절벽 아래에 보이고, 강을 건너는 아치 교각의 알칸타라 다리가 있다.

만일 기차로 톨레도를 방문할 경우 이 다리를 통과하게 된다.

현재의 다리는 13세기 후반 알폰소 10세 때 놓은 것이고,

성문은 16세기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가면 산세르반도 요새가 있다.

다리에서 보는 톨레도 경치는 아름답다.


[네이버 지식백과]

 

똘레도의 첫번째 주인은 이베로 족의 한 부류 까르뻬따노라는 민족이었고

이후 로마인이 들어와 로마제국의 변방지역으로 합병시키게 되면서

이지역을 똘레툼(Toletum)이라 불렀는데 오늘날 똘레도라는 이름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AD 418년 비시고도인들이 똘레도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왕조를 건설하게 되었고
레오비힐도 왕은 똘레도를 왕국의 수도로 정하게된다.
똘레도에서는 여러차례에 걸친 종교회의가 개최되기도 하는데
레까레도 왕은 카톨릭을 공식 국교로 정하기도 했다.

 

711년 똘레도는 아랍왕 타릭(Tariq)에 의해 점령되는데, 이때부터 약 400년간 아랍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하지만 돌레도 저항군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특히 797년 알하캄 1세 때에는 이슬람 왕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압데라만 3세는 똘레도 저항군을 대부분 진압시켰으며
이로 인해 똘레도는 이슬람 제국의 변방으로 완전히 합병되었다.

 

까스띠야 왕국의 알폰소 6세에 의해 1085년 똘레도가 수복되는데

2년후인 1087년 까스띠야 왕국의 수도가 되며 반도내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기 위한 기틀을 다지게 된다.
하지만 카톨릭왕 부처는 스페인 반도내의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게 되는데
똘레도의 거의 모든 공업과 상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도시를 떠나므로
똘레도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1561년 필리페 2세 때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게 됨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중요성을 잃게되었다. [펌]

 

 

 

좁고 복잡한 거리들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톨레도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한때 톨레도는 기독교인과 무슬림, 유대교인들이 한데 모여 사는
몇 안되는 곳이기도 하였으나 무어스민들이 이 땅에서 추방되면서
이 곳은 스페인 기독교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펌]

 

 

그러나 산책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이슬람 사원들과 서고트 스타일의 구조물, 유대교회,
르네상스식 궁전 등은 당시의 흔적을 느끼게 해 준다.
1987년 12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도시로 지정되기도 한
이 곳의 아름다운 경관에 매혹된 채 신비감에 젖어 거리를 거닐다보면
시내관광만으로도 며칠이 소요될 것이다. [펌]

 

 

 

유대인 지구임을 표시하는 다윗의 별 표식

 

16세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똘레도 특유의 복잡한 골목길도 인상적이었다.

 

 

 

<똘레도 대성당>

오늘날까지 수석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똘레도 대성당은
이슬람 왕국 시절에는 회교사원이었던 곳이었으나
1086년 알폰소 6세에 의해 똘레도가 수복되고 난후
카톨릭성당으로 개조되었다.[펌]

 

 

<대성당 신랑>
똘레도 대성당의 내부크기는 길이 120m 넓이 60m
그리고 가장 높은 천정이 33m를 이루고 있으며
모두 5개의 신랑(Nave)으로 구성되어있다.[펌]


내공 부족으로 여전히 실내의 사진은 흔들렸다.-_-

 

 

 

<뜨렌스빠렌떼(El Transparente)>
대제단의 성체 현시대 뒤쪽에는 성배 등을 보관하고 있던 작은 예배실이 있었다.
이곳을 좀 더 넓히고 조명을 주기위해 만든 것이 바로 '뜨렌스빠렌떼'이다.

제단의 모양은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가운데로 오목하게 들어간 형태를 취함으로써
역동성을 강조하고있고 중심부는 빛이 비출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금색으로 장식된 섬광 조각물과 네 명의 대천사(라파엘, 가브리엘, 미겔, 우리엘)가 조각되어있다.
뜨렌스빠렌떼의 진면목은 맞으편 돔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어우러질때
그 환상적인 자태가 나타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대리석 기둥의 조각들이 빛을 받을 때면

마치 살아서 움직이듯 다가온다. [펌]

 

 

성물실 (Sacristia)
성물실은 대제단 왼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실내는 하나의 커다란 둥근 천정으로 구성되어있다.
제일 시선을 끄는 것은 아마도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대형 천정화일것이다.
이 천정화는 이태리 나폴리 출신의 화가 루카 지오르다노의 의해 그려졌는데(17C)
일데폰손 성인에게 제의를 내리는 모습을 주제로 삼고 있다.[펌]

 

<엘 엑스폴리오(El Expolio)>

-엘 그레꼬
성물실 안쪽 정면에는 18세기에 만들어진 대리석 제단을 볼 수 있는데,
엘 그레꼬의 엘 엑스폴리오라는 그림으로 장식되어있다.
이 그림은 그의 또레도 초기 작품 중에 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1579년에 완성되었다.

 

<유다의 입맞춤(Beso de judas)>

-고야
엘 엑스폴리오 오른쪽 에는 유다의 입맞춤이라는 고야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그림은 종교를 주제로 한 고야의 몇 안되는 그림중 하나이다.[펌]

 

<베드로의 눈물>

-엘 그레꼬
여러점의 작품들 중에서 역시 빼 놓을 수 없는것이 엘 그레꼬의 사도 그림들이다.
신비한 색상의 옷을 걸치고 있는 사도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심오한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펌]

 

<성가대실의 파이프 오르간>


어디다 정신을 팔았는지 대성당 외관 사진도 안보이고
중요한 장면들을 비롯해 사진이 별루 안보인다.
아마 오래 걸은 탓에 많이 지쳐있었던 탓이겠지...-_-

 

<성가대실 호두나무 좌석 하부 조각>
성가대실에 들어서면 호두나무로 만든 수많은 좌석을 볼 수 있다.
하부는 카톨릭 국왕부터에 의한 그라나다 제국 정복 과정을 한장면씩 조각한
로드리고 알레만의 작품이다.[펌]

 

<보물실의 성경책>
양피지로 만들어진 것으로 각 페이지마다 성경 내용을 나타내는 금박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성당 내에는 보물실이 있는데 성요한 예배실이라고 하는 소 예배실에 위치하고 있다.
성당이 소유하고 있는 여러 귀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펌]

 

<똘레도 수호성인의 황제관>
이것은 이사벨 여왕이 쓰던 왕관을 알레호 데 몬또야라는 사람이
1586년 변조 시켜서 만든것이다.

 

<성체 현시대(Custodia)>
보물실의 백미는 중앙에 진열된 성체 현시대인데
엘리께 데 아르페라는 독일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1517~1524)
내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약 15kg의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금으로 된 나나만도 12000개가 넘는다.
수많은 보석들중 중앙에 있는 다이아몬드 십자가가 인상적이다.
은으로 제작된 성체현시대 외부는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16세기 말경에 금으로 도금한 것이다.
이 성체 현시대는 매년 성체 축일이 되면
똘레도 시내를 도는 행렬에 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펌]

 

<프라이 안젤리꼬의 십자가>
프라이 안젤리꼬의 십자가 뒤에는 거울이 놓여있는데 뒤에도 새겨진 그림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유일하게 뒤에도 그림이 새겨진 십자가라고 했다.

 

천정

 

 

 

 

 

 

 

 

 

대성당에서 나오니

바로 여에 세르반 테스의 동상이 떡하니 길에 서있다.^^

 

애저요리

나랑 조카는 모르고 잘 먹었는데 옆에서는 식사를 통 못하는 눈치다

이유인즉...바로 저 발 때문에..ㅋㅋ

흉하다고 접시를 엎어놓았는데 발만 달랑 나왔다.

 

<알칸타라(알깐따라) 다리>
알깐따라 다리는 타호강위에 놓여있는 로마시대의 건축물에 속하는 다리로
아랍제국 시대에도 부서지지 않고 보존되었다.
아랍군과 저항군 사이의 전투로 심하게 훼손이 되기도 했지만

다리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아랍왕조의 압달라만 3세가 손상된 교량을 보수하도록 하여

오늘날까지 다리가 보존 될 수 있었다.

이 다리에는 원래 마주보는 두개의 탑이 있었는데
하나는 1721년 마차 등이 쉽게 통행하도록 헐리고 그대신 아치문이 설치되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다른 하나의 탑은 1484년 고메스 만리께라는 건축가에 의해 지견되었는데
카톨릭 국왕부처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펌]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오니

바로 알칸사라 다리 옆이다.

 

 

이 다리에는 원래 마주보는 두개의 탑이 있었는데
하나는 1721년 마차 등이 쉽게 통행하도록 헐리고 그대신 아치문이 설치되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다른 하나의 탑은
1484년 고메스 만리께라는 건축가에 의해 지견되었는데
카톨릭 국왕부처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펌]

 

<알까사르(Alcazar)>

알까사르(Alcazar)
이거대한 건물의 기원은 로마시대까지 올라간다.
당시 성 수비대까지 거느리고 있었던 로마인들의 관아였음에 틀림없다.
또한 이곳 똘레툼이라 불리는 로마인들의 성벽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건물의 주목적은 로마시대부터 군사적 목적으로 세워졌듯이
비시고도시대나 아랍 점령시기에도 변함없이 군사적 요새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펌]

 

 

<알까사르와 알깐다라 다리>
11세기에 알폰소 6세가 똘레도를 수복한후 알까사르를 재건축하게되는데
유명한 엘시드 장군이 이 요새의 첫 주인이 된다.
이후 알까사르는 많은 왕들이 거처로 삼았던 왕성으로 변모하게 된다.
1561년 펠리페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게 되자
알까사르는 왕실 가족의 비정규적인 숙소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오늘날에는 무기의 변화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펌]

 

<산 마르틴 다리(Puene de San Martin)>
똘레도의 전경을 구경하고 돌아나오는데 뒤로 다리 하나가 보인다.
급하게 버스안에서 셔터를 눌렀더니 유리에 비쳐진 흐릿한 모습..
산 마르틴 다리는 14세기 전반에 건축된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현재의 산 마르틴 다리 옆으로 아랍시대에 만들어졌던 다리가 있었는데
이는 1203년 홍수로 인해 완전히 부서졌으며
그 흔적으로 일명 '까바 목욕탕'이라고 불리는 전설과 함께
오늘날까지 아랍다리의 교각이 그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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