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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둘러보기/2007 남유럽

스페인, 마드리드

by 포도주빛 바다 2016.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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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Madrid]

마드리드는 10세기경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되었는데, 마헤리트라 불렀다.

이 성은 마드리드가 수도로 된 후에는 왕궁이 되었고, 동시에 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1083년 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이를 탈환하였으나 이때는 국왕의 임시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1561년 펠리프 2세가 당시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릴 중앙정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도 바야돌리드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세기 초에 일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마드리드는 그 후 일관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구()시가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다.

1808년에는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로 유명한 5월 2일의 시민저항이 있었고,

다음날 프랑스군에 의한 보복이 있었다.

구시가의 중심은 라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며,

서쪽으로는 왕궁 및 부속 왕립 무기고와 통하고, 남서쪽으로는 17세기에 야외극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이 있다. 그 앞쪽의 세바타 광장에서는 아침에 채소와 식료품 시장이 열린다.

태양의 문 북쪽을 동서로 활처럼 휘어 뻗은 호세안토니오가()와 동쪽으로 뻗은 알칼라가에는

은행 ·호텔 ·클럽과 고급상점들이 집결하여 중심 상점가를 이룬다.

태양의 문 동쪽은 거의 남북으로 프라도가()가 뻗고, 그 동쪽에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프라도가는 다시 레코르테스 ·카스티야 ·헤네랄리시모 등 여러 거리로 이어져 관공서와 고급주택지를 이룬다. 구시가를 둘러싼 신시가는 19세기 후반의 철도 개통을 전후해서 주택지 ·공장 등이 들어서고

교통시설이 갖춰진 지역이다.

마드리드는 정치도시로서 궁전이 있었을 뿐 산업은 미미하였으나,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후 에스파냐 정부가 내전에 의한 파괴의 복구 과정에서,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건설노무자를 받아들인 것이 마드리드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전기기계 ·항공기 ·오토바이 등의 기계공업과 식품가공 ·제지 ·화학 등의 여러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정보산업으로서 출판 ·인쇄업종도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전해 왔다.

1738∼1764년에 건설된 왕궁은 높이 30 m의 건물로, 방이 1,800여 개나 되고,

내부는 고야의 그림, 티에폴로의 벽화, 많은 테피스트리로 장식되었다.

왕궁에 부속된 왕립 무기고는 갑옷과 무기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프라도 미술관은 에스파냐가 세계에서 자랑하는 미술관으로,

1819년 에스파냐왕실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개설되었다.

중세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에스파냐 ·플랑드르 ·이탈리아의 그림이 많으며,

특히 에스파냐 3대화가인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은 최고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 데르 바이덴의 《십자가 하강》, 보시의 《일락의 낙원》, 티치아노의 《음악을 즐기는 비너스》, 엘 그레코의 《오순절()》, 벨라스케스의 《브레다 성()의 항복》 《궁녀들》,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 《나체의 마하》 등 수없이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페인 광장>
마드리드 방문은 돈끼호테와 세르반테스가 반기는 스페인광장에서 시작했다.

 

<돈끼호테와 산초의 동상>

 

<세르반테스의 동상>

 

현지 가이드와 현지인 가이드

 

 

<아르메니아 광장과 왕궁의 정면>


마드리드 왕궁

동쪽에 있어 '오리엔테 궁전(Palacio de Oriente)'이라고 불린다. 

에스파냐 왕의 공식 거처이자 에스파냐 왕실의 상징인 곳으로, 

9세기에 이슬람교도가 당시 에스파냐의 수도였던 톨레도로부터

마드리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채를 세운 자리에 있다.

그리스도교가 마드리드를 탈환한 후 이슬람교도의 성채를 왕궁으로 사용하였지만

173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펠리페 5세가 그 자리에 왕궁을 지을 것을 명하고 26년에 걸쳐 사각중앙 정원식으로 완성하였다.

과거의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돌과 화강암으로만 건축하였는데, 

화강암은 과달라마 산맥에서 캐온 것이다.

에스파냐 왕의 공식 거처인 곳이나 공식 행사에만 사용되고 실제로는 왕가가 거주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일반인에게 개방하는데, 총 2,800여 개의 방 중 50개 정도의 방을 개방한다.

벨라스케스, 고야 등 스페인의 대표적 화가들이 그린 회화와 화려한 태피스트리도 왕궁의 자랑이다.

왕궁 앞의 오리엔테 광장에는 생동감 넘치는 펠리페 4세의 기마상과 에스파냐의 왕,

에스파냐 출신의 로마 황제 동상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사유 궁전을 본적 없어서 베르사유궁과 얼만큼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스트리아의 쉔부른 궁과는 좀 닮아있었다.
내부에서 보았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그저 마음에 담고,
똘레도에서 구입한 한국어 책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궁안은 절대 촬영금지...-_-;;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la Almudena)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la Almudena)

왕궁의 아르메리아 광장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알무데나 대성당은 그이름의 어원이

아람어에서 기원한다는 점이 특이한데 아랍어로 알무데나는 요새, 성벽을 의미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랍인들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느낀 마드리드 주민들이 아랍인들에 의해

성모상이 모독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성벽의 한곳에 성모상을 숨겼다.
후에 마드리드가 수복되고 나서 그 성보상을 찾으려고 했으나 세월이 많이 지나서 찾지 못하다가

어느날 성벽 한부분이 무너지면서 성모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알무데나 성모라 불렀고 이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 알무데나라고 한다. [펌]

 

가까이에서 바라본 알무데나 성당
다가가서 보는 것도 뜨거운 태양 탓에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마드리드의 하늘은 참 뜨거웠다.
태양이 작렬하는...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해되는...
마드리드의 기후는 맑은 날이 많으며,
고원도시인 까닭으로 한서의 차가 극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에는 무척 더우나 공기가 건조하여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고
겨울에도 바람이 없는 날이면 큰 추위는 느끼지 않는다.

 

<프라도 미술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출발하기 전에 구입한

'프라도 미술관'이란 책 덕분에 알차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까를로스 3세 시대인 1785년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원래는 자연과학 연구소의 용도로 세워진 건물이었으나

반 나폴레용 독립전쟁이 기간 동안 많은 부분이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페르난도 7세에 의해 복구되어 1819년 왕립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실 이번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미술과의 만남이었다.
똘레도의 산토 토메 성당에 있던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을 그린 엘 그레꼬와
마지막날 들렀던 피카소미술관에서 피카소와의 만남은 몹시 행복한 일이었다.
특히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난 고야에 대한 인상은 너무 강렬해서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슬픈 눈빛을...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원래 마요르광장이 위치한 곳은 아라발 광장으로 알려졌던 곳으로

낡은 집들이 광장 주위를 둘러싼 불규칙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펠리페 2세 때 먼저 이곳에 대한 확장 및 정리 공사가 있었으며,

펠리페 3세 때 정식으로 의회는 고메스 데 모라로 하여금  이광장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여

1620년 이시드로 성인의 축제와 함께 개관되었다.

그러나 그후, 1631, 1672, 1790년에 세번에 걸친 화재를 겪으며 원래의 모습이 변하게 되는데

환 데 비야누에바라는 사람이 보수공사를 맡게 되면서 9개의 아치를 갖춘 직사각형의 모양을 갖추게 된다.

그후 왕실, 접견실, 사형식, 투우경기, 승마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현재에는 광장 주변으로 기념품 가게와 주화가게 커피숖, 여관, 고급 식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펌]  

 

 

 

 

<필리페 3세의 동상>
광장 중앙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환 데 볼로니아 작품의 펠리페3세의 동상이 있는데
마요르 광장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왕이다.[펌]

 

어느 순간 한쪽 입구로 중세 시대에서 온듯한 수도사들이 광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마요르 광장 한구퉁이 앉아서 아침 햇살을 바라보았다.
유럽의 거리에서 느끼는 여유는 뭘까?
어느 도시에나 있는 공원들...
그리고 도심 한복판 빌딩 사이에 넓게 펼쳐진 광장들...
그런 것들이 나한테 주는 여유는 늘 그리움으로 남는다.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 광장>
이곳은 9개의 도로가 시작하는 Okm지점, 즉 9개의 국도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ㅋㅋ 내발...
마드리드 기점 표시라고 했다. 0Km 지점...

 

<까를로스 3세의 개선문>
아라곤으로 통하는 옛성문이었는데 서구열강들로부터 스페인을 지켜내고 재건에 힘쓴
까를로스 3세의 개선을 기념하기 우해 세워진 개선문이다.
문 중앙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는데 여기가 독립광장이다.
까를로스 3세는 스페인이 서구의 열강들로부터 수난을 당하던 시기에 왕위를 계승받아
스페인의 재건에 힘쓴 왕으로 마드리드시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펌]

 

<레티로 공원(Parque del Retiro)>

이곳은 펠리페 4세의 부엔 레티로 궁의 정원이었으며,
그이전 펠리페2세 때에는 두 번째 부인이었던 영국의 튜더 메리 여왕을 위해 지은 궁이 있덨던 곳이기도 하다. 이공원은 19세기 중반 마드리드 시에 양도 됨으로써 일반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는데
마드리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중의 하나로 역사적, 예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펌]

 

 

<인공호수와 알폰소 12세의 동상>
공원 중심에는 인공호수가 있으며 호수 옆에는 마리아노 벤이우레 작품의 알폰소 12세 기념비와
벤뚜라 로드리게스가 만든 알까초파 분수가 있다.[펌]

 

너무 한적하고 깨끗한 그리고 예쁜 공원의 모습이
마치 어린시절 달력에서 본듯한 정경이라 너무 기뻤다.

 

 

바쁜 일정이 아니라면 이런 곳에서 오래 오래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았을 텐데...
아. 쉽. 다....

 

 

<벤따스 투우장>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마드리드의 투우는 종종 마요르 광장에서 열리곤 했다.
이후 1929년이 되어서야 마드리드 투우장이 만들어졌는데,
이투우장은 스페인의 수 많은 투우장 중에서도 가장 큰 투우장으로
22,300명의 투우 팬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스페인 모든 투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마드리드의 투우장은 아니발 곤살레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신 무데하르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3월부터 10월 말까지는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에 투우가 있으며,
마드리드 수호 성인인 성 이시드로 축제(5월15일)가 열리는 5월에는 축제일을 전후하여 20일간

스페인 최고의 투우사들의 기량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펌]

 

 

 

투우경기중 사망한 투우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탑이다.

 

달려나오는 소때의 모습이 좀...^^

 

투우사를 위한 의사 기념비라는데...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무사히 경기를 끝내길 기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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